[이필렬] 극우와 보수 '초록은 동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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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14 12:21 조회20,2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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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총선이 있었다. 두 나라 모두 녹색당은 표를 잃었고, 독일에서는 극우정당이 거의 표를 얻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20%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며 크게 세를 불렸다.
나는 두 나라에서 모두 살아보았는데,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에서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군복 입고 군화 신은 신나치들과 종종 마주치고 그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언론에서 자주 접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보다 부드럽고 친절하다는 것이 내가 두 나라에서 살면서 받은 인상이다.
그러면 왜 오스트리아에서 극우가 그토록 많은 표를 얻는 것일까?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유로 위기도 극복해 경제 상황도 나쁘지 않다. 실업률은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 작은 나라이기에 독일에 비해 주목을 덜 받지만 국민들에게 독일보다 더 편안한 생활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극우가 높은 지지를 받은 이유가 나는 두 나라 극우의 폭력성 차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독일의 극우는 외양이나 행동에서 모두 극우다움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외국인에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살해하기까지 한다. 2000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9명의 외국인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극우조직도 있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지만 주모자는 반성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터키 사람들이 살던 연립주택에 불을 질러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사건도 여러 번 일어났다. 반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극우의 폭력이 인구 대비 비율로 봐도 독일보다 훨씬 적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두 나라의 과거청산 수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치 범죄의 주범국 독일에서는 높은 수준의 청산이 이루어졌지만, 오스트리아는 자신을 나치 범죄의 최초 희생자 또는 기껏해야 종범으로 내세우면서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가 이야기하듯이 나치 범죄의 책임을 모두 독일로 미루면서 교묘하게 과거청산을 덮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 결과 극우가 독일에서는 고립되면서 폭력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 속에 섞여들어갈 수 있었기에 폭력성이 제어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극우정당에 대해 큰 저항감이 없다. 호감 가는 모습의 젊은 당대표가 선거운동을 하면 오스트리아 청년들은 물론 외국인 2세 젊은이들까지 상당수가 지지표를 던진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안정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폭력적인 극우가 개인에게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사회 전체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인 반면, 그런 사회에서도 ‘부드러운’ 극우는 알게 모르게 사회를 잠식해갈 수 있고, 과거에 대한 해석방식과 반성의 정도에 따라 현재의 정치사회적 지형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과거에 대한 해석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반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재와 민주, 극우와 보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기 어려운 뒤죽박죽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극우는 고립되어 있지 않고 사회 속에 널리 퍼져 있다. 극우성 발언이 집권당 정치인들 입에서 심심찮게 나오고, 교과서 저자까지도 공개적으로 극우임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겉으로는 폭력적인 극우와 ‘점잖은’ 보수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실은 서로 의존한다. 폭력성향 극우의 위협적 행동에 대해 ‘점잖은’ 보수 쪽에서 비판이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극우와 보수가 연립정치를 했지만, 우리의 경우는 보수와 극우가 하나로 뭉쳐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와 달리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에는 극우가 자기 존재의 정당화 도구로 삼는 북한이 버티고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극우가 날뛰어도 비판의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지금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오스트리아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멀리 본다면 지금은 조금 위험하지만 극우 정치집단을 고립시킬 줄 아는 독일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 교수
(경향신문, 201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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