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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공포에 발목 잡힌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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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29 16:15 조회21,8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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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앤절리나 졸리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졸리가 유전자 변이에 의한 유방암 가능성을 낮추기 위하여 지난 2월 유방절제와 재건 수술을 받았다고 밝히고 난 뒤, 시사주간지 <타임>은 ‘앤절리나 효과’라는 제목과 함께 그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고, 국내에서도 예방적 절제술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니 말이다.

물론 불편한 사실들도 따라왔다. 기고문을 통해 상상되는 졸리의 가슴을 둘러싸고 관음적인 관심이 넘쳐남과 동시에, 여성으로서 어려웠을 결정을 공개했다고 졸리를 예찬하는 글 역시도 유방을 ‘여성의 상징’이라고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졸리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로서 자신이 한 선택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점이 불편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유전자 변이에 의한 유방암이 엄마들만 걸리는 것도 아니고 자식 없는 여성의 죽음은 덜 안타까운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아직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반응일 것이다. 부디 순수하게 의학적인 측면만으로 이 문제를 보아달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입장에 따를 때, 사실 졸리의 결정은 근거가 없지 않다. ‘브래커’라고 읽는 ‘BRCA’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면 실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변이가 없는 여성에 비해서 다섯 배까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니, 졸리처럼 가족력을 가진 경우에 예방적 유방절제는 적어도 당사자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결정이다.

그런데 공포를 이겨내고 내린 장한 결정이라고 하는데 들여다볼수록 심란해지는 것은 웬일인가. 이건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다. 난소암 때문에 졸리가 조만간 난소를 포함하여 자궁도 절제를 한다고 하기에 자료를 찾아보니, 브래커 유전자는 췌장암과 담낭과 담도암, 대장암, 위암, 자궁경부암, 자궁체부암, 남성유방암 등의 위험을 모두 높인단다. 그러면 이 많은 장기를 다 도려내야 할까? 그나마 유방을 절제해도 남아 있는 유방조직에서 암이 생길 수 있고, 심지어는 유방절제가 발병률은 낮춰도 생존율을 높인다는 근거는 없다니 일단 마음이 푸근하게 놓일 이야기는 아닌 게 분명하다.


또한 가족들은 유전자 외에도 생활환경이나 습관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서 브래커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과연 정확히 얼마나 위험을 증가시키는지도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유방암이 모두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도 아니라니, 결국 특허가 걸려 고가라는 이 유전자 검사가 무용한 것은 아니어도 해결해주는 것도 별로 없다는 이야기이다.

앞날에 걸릴 수 있는 질병을 두고서는 확실한 걸 추구할수록 돈은 돈대로 쓰고 근심은 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건강한 몸과 삶을 위해서 필요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결국은 어떤 병으로든 죽게 될 나를 중심에 놓고 보면 질병과 예방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필수적인 의료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도 많지만,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깟 돈이 아깝겠냐는 돈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몸에 닥칠 불행이 어디 내 한 몸 간수한다고 될 일이던가. 공장에서 새어나오는 불산이며, 동네로 지나가는 고압 송전탑과 원자력발전소가 끼치는 해악, 이 나라 최고라고 들어간 직장에서 얻는 병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돈벌이 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급격히 붕괴하고 있는 의료체계도 문제다. 유전자 변이에 의한 유방암조차도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발병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공포에 사로잡혀 내 몸과의 전쟁을 벌이기 이전에 우리의 몸과 삶이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모습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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