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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원전마피아가 본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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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19 15:38 조회23,9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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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 사태로 시작된 우리 사회의 갑을관계에 대한 분석이 종결된 것 같다. 결론은 을도 대부분 갑이라는 것. 우리가 을의 수모도 당하지만 동시에 ‘갑질’도 한다는 것이다. 을도 갑이라는 말은 10년쯤 전에 유행했던 ‘우리 안의 파시즘’을 연상시키는데, 아무도 이 말을 갑을관계에 끌어다붙이지는 않는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언어 왜곡을 통한 본질 흐리기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이 우리 안에 있고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파시즘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말이 재등장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만, 대신 포퓰리즘·종북·마피아 같은 말들이 본질 흐리기에 무차별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이들 중에서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마피아다. 천인공노할 원전비리가 폭로된 후 원전 마피아라는 말은 유행어가 됐다. 포퓰리즘·종북은 주로 보수 쪽에서 사용하지만, 원자력 마피아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원전 반대 진영에서 즐겨 썼지만, 찬성 진영도 거리낌없이 입에 올린다.


원전 찬성자들은 원전 마피아라는 말의 유행을 은근히 반길지 모른다. 본질을 감추기 때문이다. 이번에 폭로된 비리는 원자핵공학과와 한국수력원자력 출신의 마피아 탓이 아니다. 원전의 근본 속성,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속성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진전할수록 원전은 후퇴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후퇴를 거듭한 이명박 정부 때 원전의 비리가 크게 확대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비리는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는 않았기에 원자력 업계가 마구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원자력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보였다. 노동조합의 변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파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잠하기만 하다.

이들에게 원전 마피아라는 말은 굴러들어온 복덩이나 마찬가지다. 희생양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들만 희생시키면 원전은 다시 전진할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 희생양을 자기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반대 진영에서 선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종북이란 말을 진보의 최일선에 있던 사람이 보수에게 바쳤듯이.

원전은 원자탄과 마찬가지로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폐쇄성을 벗어버릴 수 없다. 이것은 원전 마피아가 척결된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약화되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폐쇄성을 조금이라도 부수는 것이다. 원전이 돌아가는 한 그것을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 큰 흠집을 내는 것은 가능하다. 원전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면.



지금 원전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국가 소유이기 때문이다. 소유자가 제대로 된 감시자가 되기는 어렵다. 원전이 민간회사 소유라면 소유와 감시가 분리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일본처럼 둘 사이에 강한 유착관계가 형성되면 소용이 없다. 독일처럼 연방정부, 지방정부, 시민사회, 지역주민, 전문가집단이 5중으로 감시할 수 있어야만 폐쇄성을 부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식 감시는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된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원전의 확대도 어렵다. 독일처럼 원전 축소와 폐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전 폐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원전을 국가 소유로부터 완전히 떼어내고, 민주주의적 감시기구를 만드는 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마피아를 연구하는 이탈리아의 어느 학자는 “모든 것이 마피아라면 아무것도 마피아가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데나 마피아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마피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원전 마피아라는 말이 유행할수록 원전의 본질은 덮어진다. 원전의 확대를 돕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 상황이 그렇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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