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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독일통일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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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7-26 17:24 조회31,9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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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는 것처럼 대표적인 분단국가들 가운데 베트남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상태로 남아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물론 간단한 것일 수 없다. 단지 불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고 주체적 역량도 모자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지혜를 살려 그 점을 연구하고, 이제라도 뜻을 모아 분단극복에 기여해야 한다. 통일까지는 요원하더라도, 적어도 평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데는 우리 모두의 정성을 보태야 한다고 믿는다.

  나라마다 다른 분단의 성격

  한 마디로 세 나라는 분단의 성격이 다르고 분단극복에 기울인 노력이 달랐다. 베트남은 외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세력과 식민지배를 계속하려는 프랑스·미국 등 제국주의 외세 간의 싸움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쟁은 전형적인 민족해방전쟁이자 통일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통일은 외세의 지배에 대한 베트남 인민의 투쟁의 전국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군대의 분할점령이 분단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외관상 비슷하다. 그러나 독일은 연합국 군대가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투 끝에 점령에 성공한 반면, 한반도는 일본의 무조건항복에 따라 별다른 전투 없이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점령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전범국가인 동시에 승전국의 점령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패전국가였다. 하지만 한국은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해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에 대항해 오랜 저항운동을 벌여왔었고, 따라서 연합국들이 전쟁 중에 합의한 대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독립국가로 승인하기만 하면 되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한반도는 일본 대신 독일처럼 분단의 운명을 맞았다. 유럽대륙을 동서로 갈라놓은 냉전체제가 동북아시아에서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쪼개놓은 것이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6·25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통일을 목표로 벌인 전쟁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내부에, 그리고 한반도 주위에 반통일적 대결구조를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정전 60돌을 맞은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정상적 흐름에 역행하는 분단의 구조물들 때문에 매일같이 고통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 달에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소개하려고 한다. 하나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회고록『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탁재택 옮김, 창비 2012)이고, 다른 하나는『변화를 통한 접근』(김누리·김동훈·배기정·안성찬·오성균·이노은 지음, 한울 2006)이라는 인터뷰집이다. 둘다 독일과 관련된 책들인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든 우리 자신의 경우를 떠올리며 탄식과 선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독일통일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려고 한다.

  동방정책을 지지한 기독교 정치인, 바이츠제커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 1920~ )는 1981년부터 84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그리고 1984년부터 10년 동안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 대통령으로 재직했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서 독일의 분단현장과 통일과정을 경험한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회고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도로서 1964년 기총(기독교총연합회) 의장에 선출될 만큼 깊숙이 종교계에서 활동했었고 정치인으로서 소속정당도 기민련(기독교민주연합, CDU)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회의원으로서나 대통령으로서나 일관되게 사민당(사회민주당, SPD) 정부의 동방정책을 지지했다. 요컨대 그는 기독교정신에 투철한 정치가이자 정파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 잡힌 지식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이츠제커의 회고록에서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독일의 ‘통일에 이르는 길’(책의 원제가 Der Weg zur Einheit이다)을 단지 정치사적으로만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 체험들과 연결시켜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민당 정부에서 에곤 바르가 설계하고 브란트 수상이 추진한 동방정책은 실상 동독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동유럽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바이츠제커야말로 동유럽문제 해결이 필생의 정치적 과제로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바로 1939년 9월 1일 그는 독일 침략군의 일원으로 폴란드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이튿날인 9월 2일 같은 대대 소속의 작은형이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사했고 그는 밤새 형의 시신을 지켰다. 이 아픔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그는 회고한다.

  1945년 8월 포츠담협정은 구(舊)독일령 중 동프로이센 북부를 소련령으로, 오더·나이세 강 동쪽지역을 폴란드령으로 결정하였다. 동프로이센으로 시집간 바이츠제커의 누이를 포함해 수백만 독일인들이 오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서독으로 이주했다. 동독과 폴란드는 이른바 사회주의 형제국이었지만 그들 사이에 우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무렵 폴란드 주교단으로부터 화해를 청하는 서한이 독일 가톨릭에 전해졌고, 독일 주교단은 실향민의 무거운 운명과 관련하여 폴란드 측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를 계기로 서독 정계에서는 오더-나이세 국경선 인정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새로운 동방정책의 등장이 불가피해진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란트 수상은 1970년 12월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에 서명했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폴란드 침공에 앞장섰던 군인 출신 바이츠제커는 의정활동 첫해를 이 과제에 몰두하며 보냈다. 서독과 동유럽 간의 역사적 화해가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1972년에는 동서독 간에 상호기본조약이 체결되어 우호관계의 수립, 양독 사이 현 국경선의 인정, 유엔 동시가입을 결정했다. 자 그러니, 국경선도 영토선도 아닌 NLL(북방한계선)을 가지고 온통 나라를 뒤집어놓는 사람들이 1970년의 브란트 수상과 바이츠제커 의원에 대해서는 뭐라고 비난할 것이며 후일 언젠가 통일이 된 다음에는 또 뭐라고 자신을 변명할 것인가.

  통일운동의 중심에 선 교회

  분단의 순간부터 통일의 그날까지 역사전개의 가장 중요한 내적 동력은 교회였다. 분단 이후 동독과 서독은 “서로 현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양쪽 국민들 간에 공동체의식은 이어져 있었다.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교회, 특히 개신교였다. 19세기에 출범한 평신도운동인 독일 기총은 나치시대에 중단된 적도 있으나 종전 후 빠르게 재건되었다. 특히 동독에서는 교회가 “유일무이하게 자립적이면서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바이츠제커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동서독 양 지역 신도들에 의해 선출된 기총 명예의장으로서 양쪽 업무를 총괄했으므로 교회의 핵심적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이츠제커에 의하면 1949년의 첫 기총 행사에서도 중심문제는 통일목표를 세우는 것과 사람들 간의 결속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1950년 에센 행사에는 신도 15만 명이 모여 동서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국가정책과 무관하게 통일된 사회적 의견을 제시하고자 했다. 1951년 베를린 행사의 마지막 날에는 “우리는 형제입니다”라는 모토 아래 30만 신도들이 모여 국민적 단결을 과시했다. 동독 신도들의 서독행이 어려워진 1954년에도 동독지역 라이프치히에 60만 동서독 신도들이 집결하여 강력한 연대를 보여주었다. 이 행사의 폐막 때 낭독된 다음과 같은 선언은 당시의 독일인에게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인에게도 살아있는 감동을 준다.

  동서독이 통일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고 험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지쳐 무너지고 다른 한쪽이 자신만 살려고 할 위험성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단결해나갈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 p.40)

  하지만 차츰 동독인들의 행동에 제한이 가해지고 기총 공동행사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의 설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래도 연결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동독에서 열리는 행사에 서독인이 참석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1983년 동독 비텐베르크에서 열린 루터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에 바이츠제커는 서베를린 시장 자격으로 참가하여 수만명 군중 앞에서 이렇게 연설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여건, 서로 다른 사회제도, 서로 다른 개인적 활동의 조건 속에서 각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상대방에게 부적절한 충고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분단상황에서 살고 있지만 같은 독일인입니다! 우리는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인 근본적인 목표들은 우리 공동의 것입니다. (…)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동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을 최소화하고 세상의 정의를 장려하는 것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앞의 책, p.78)

  1980년대 통일과정에서 동독교회가 그야말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한반도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북한에는 정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립적 종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고, 남한에서도 대형교회·부유사찰의 지도부는 기득권체제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 민주주의의 퇴보와 분단의 강화에 오히려 봉사하고 있지 않은가.

  통일이라는 교향곡

  통일의 달성에 동서독 간의 내부적 합의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1945년 이후 동독과 서독에 소련군과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점을 극명하게 입증한다. 따라서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정치가들로서는 승전 4대국의 동의를 구하는 데 힘써야 할뿐더러 폴란드· 체코 등 주변국들에게도 통일독일의 탄생이 새로운 위협의 출현이 아님을 납득시켜야 되었다. 통일을 위한 국제적 환경의 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국은 서유럽의 연대를 전제로 처음부터 통일의 목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새로운 독일에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통일의 역사적 필연성을 인정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만은 유럽공동체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차원에서 독일통일에 대해서도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독일 정치가들은 강대국의 이러한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현명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각자의 체질에 맞게 강대국 지도자들과 우정을 맺고 그것을 통일정책의 추진에 활용했다. 바이츠제커는 미테랑이나 고르바초프와 나누는 지적인 대화를 즐겼고, 헬무트 콜은 레이건과 배짱이 맞는 편이었다. 에곤 바르와 헨리 키신저는 최고수준의 외교 책략가들로서 완전히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적절한 편제를 이루어 통일이라는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바이츠제커는 냉전의 종식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고 독일통일을 이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적응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일통일이 유럽통합과정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의 날이 왔을 때 베를린 중심가 필하모니 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할 수 있었다.

  우리의 통일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된 것이 아니며 평화롭게 합의된 것입니다. 독일통일은 민족의 자유와 유럽대륙의 새로운 평화질서 정착을 목표로 하는 유럽 역사발전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우리 독일인들은 기여코자 합니다. 우리 통일은 이에 봉헌합니다. (…) 국경이 더 이상 분리의 선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절실합니다. 독일의 모든 국경은 인접국들과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지입니다.(앞의 책, p. 122~3)

  물론 특별한 날에 행한 기념사로서 이 연설은 현실의 묘사라기보다 이상의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통일 이후 20여년 동안 독일이 20세기 전반기와 같은 헤게모니 권력을 추구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세계에 주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오히려 국제관계보다 동서독 간의 심리적·사회문화적 통합이라는 내부적 과제의 해결이었다. 그것이『변화를 통한 접근』의 주제이다.

  좋은 책을 소개하는 기쁨

  독일통일 15주년을 맞아 통일정책·통일운동의 주역들 18명과 가진 인터뷰를 정리해서 묶은 책이『변화를 통한 접근』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약간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2007년 초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베를린에 거주할 때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를 만나 그의 안내로 작센하우센 집단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시대의 유적지 몇 군데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그러고 나서 그로부터 기증받은 책이『변화를 통한 접근』이었다. 당시 무슨 바쁜 일로 읽다말다 하다가 책을 들고 귀국하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다가 이번에야 겨우 약속을 지켰다. 뒤늦게 읽은 게으름이 좋은 책을 소개하는 기쁨으로 바뀌니, 여기서도 새옹지마를 경험한다.

  이 책은 인터뷰집이라고 하지만, 대표저자인 김누리 교수를 비롯한 여섯 연구자들이 공동토론을 통해 주제를 정하고 인터뷰 대상의 선정부터 그 대상자의 활동경력·사회적 입장·저술 등에 대한 면밀한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으므로, 현장연구서와 같은 전문성을 지닌다. 그러나 결코 딱딱한 학술서는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원래 의도는 통일 이후 동독주민들이 겪는 사회경제적·문화심리적 갈등의 실상이 어떤 것이고 그것들이 통일사회 안에서 어떻게 치유·극복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뷰 대상자들로서는 그 점을 얘기하자면 먼저 통일과정에서 어떤 일에 관여했고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그런 경험담은 통일 후에 발생한 문제들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여전히 남북대결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는 본래의 주제보다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경험에서 극적인 긴장감과 소설적 재미를 맛보는 것도 역설적이지만 분단의 위험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정치가 3명, 작가와 지식인 4명, 시민운동가 4명, 종교인 3명, 언론인 4명으로서 대부분 우리에게 생소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독일통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며, 책을 기획한 취지에 비추어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동독 출신이다.

  적을 동지로 바꾸는 기술

  이 가운데 브란트 수상의 핵심참모이자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동방정책 목표의 창안자였던 에곤 바르(Egon Bahr, 1922~ )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이 책의 제목은 바르의 그 구호를 뒤바꾼 것이다.) 브란트가 수상이 되고 바르가 정부의 정책기획팀을 맡게 되었을 때 “독일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가를 묻는 질문에 바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 2년반 동안 우리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검토하여 답안을 만들었습니다. 독일문제와 관련하여 4대 강국과 동독은 물론 폴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체코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지요. 가능한 모든 질문을 제기하고 여기에 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검토했는데, 이것을 정리한 문건만도 2,000쪽에 달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27쪽으로 만들고, 다시 한 쪽 반으로 축약한 문서를 회담에 제출했습니다.(『변화를 통한 접근』, p.48)

  당시 소련 외상 그로미코는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서독 측은 철저한 사전준비를 했기 때문에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0년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바르는 회고하는데, 이 철저한 준비야말로 정책성공의 담보였고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또한, 그는 한 보수적인 언론인이 “정부각료로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의 수준을 넘어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사상공세를 퍼부은 데 대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언론인으로서는 여론의 어느 한쪽 입장에서 관찰하고 비판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 회담이나 협상에 임할 경우에는 상대방을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파트너로 볼 것인가를 우선 결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나는 많은 경우 상대방이 적일지라도 파트너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정치에는 항상 비밀통로가 있기 마련입니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막론하고 실제로 중요한 결정은 여기서 이루어 집니다.(앞의 책, p.58)

  이 답변은 특히 우리 정부의 고위 지도자와 대북문제 전문가들이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르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해오고 있고 날카롭게 판단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증명하고 있다.

  통일이 반드시 현실적 목표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60년 동안 동독보다 더 극단적인 집단주의적 사회화를 겪었습니다. 또한 남한도 서독처럼 북한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남북한 모두 서서히 접근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잘 알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앞의 책, p.63)

  참된 자유와 진정한 적이 있는 곳에서

  분단시대가 고통과 모순에 가득찬 시대였던 만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 또한 평범한 것일 수 없다.『변화를 통한 접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도 당연히 평탄한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시인-작곡가-가수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 1936~ )과 작가-언론인인 리타 쿠친스키(Rita Kuczynski, 1944~ ), 역사학자로서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토마스 클라인(Thomas Klein, 1948~ ) 및 분자의학계의 저명한 학자로서 시민운동가인 옌스 라이히(Jens Reich, 1939~ ) 등에게 커다란 매혹과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 가운데 비어만 한 사람만 소개하려고 한다.

  비어만의 아버지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로서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되었고 어머니는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사명”을 통해 인류구원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조기교육 덕분에 그는 17살 되던 1953년 고향 함부르크를 떠나 “영혼의 조국인 동독”으로 이주한다. 어머니도 당연히 함께 가고 싶어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당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어만은 동독으로 건너간 직후부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현해서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당국은 한편으로 그가 아직 철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다른 한편 서독에 대한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싶어서 그를 방임해 두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와 노래는 점점 더 널리 퍼져 당국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마침내 당 지도부는 그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배신행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라고 요구했는데, 어머니는 동독 당국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항했다고 한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동지들, 내게는 이 아이뿐입니다. 내 하나뿐인 자식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소연했을 겁니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지요. “볼프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다. 공산주의의 적은 바로 너희들이다. 볼프야말로 진정한 혁명가이고, 너희들이 바로 반혁명분자들이다.” 어머니는 모성 본능보다는 공산주의자로서 내 편에 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앞의 책, p.125~6)

  결국 비어만은 11년간 동독에서 취업을 금지당한 끝에 1976년 11월 서독에서의 공연을 허가받아 출국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어만에 대한 동독정부의 계획적인 추방조치였다. 왜냐하면 그는 쾰른에서 공연하는 도중 시민권박탈로 동독입국이 불허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동서독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것이 “동독 종말의 시작”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동독 안에서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이 정부비판에 나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어만 자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지요. “이런 바보천치가 있나. 이곳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껏 노래하고 많은 돈을 벌고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해야지!” 물론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모든 인간은 그가 필요한 존재이고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곳, 참된 자유와 진정한 적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만 어디를 조준하고 어디를 가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이곳 서독에서 나는 유령 같은 존재라고 느꼈습니다.(앞의 책, p.129~130)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그는 자신이 소년시절 동독으로 건너갈 때 지녔던 꿈, 어머니가 그에게 이루기를 바랐던 소망의 실현불가능성을 인정한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정치적 이상이 남김없이 실현된 낙원을 억지로 건설하려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론 불의와 죄악에 대해 투쟁함으로써 세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지만, 그것은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낙원의 환상 때문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서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성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비어만은 한국의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인터뷰가 있은 지 넉 달 뒤인 2005년 5월 그의 콘서트가 한국에서 열렸다. 나는 가수 정태춘 부부와 함께 갔던 그날의 학전소극장을 잊지 못한다.

  단언하건대 한국의 통일은 독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위험성을 지니고 당신들 앞에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독일인들도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당신들이 겪을 일에 비하면 그 정도는 매우 값싼 대가로 여겨질 정도로요. (…) 남북한의 통일이 낙원을 가져오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옥에 이르지 않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통일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나의 희망은 천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상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이제 나의 희망이라는 말입니다.(앞의 책, p. 143)


염무웅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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