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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연필 - 존재의 기본 원소를 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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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9-04 16:38 조회21,8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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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17.2㎝인 가느다란 육각형 나무막대 한가운데에 지름 0.8㎝인 검은 심이 박혀 있다. 이게 이 사물의 전부다. 물건에 따라 심 굵기에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모양의 변주는 없다. 극히 단순한 모양새만큼이나 쓰임새는 명확하며 사용법은 간단하다. 특별한 설명도 필요 없이, 손에 쥐면 누구나 그 즉시 사용하는 사물, 연필이다.



어린아이에게도 쥐어주면 바로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에게 `쓰다`와 `그리다`는 무슨 뜻인가. 그건 `입말`에서 `손-글자`로, `눈`으로 직접 맞닥뜨린 자연을 `손-그림`으로 재현하는 세계로 진입한다는 뜻 아닌가. 글자건 그림이건 간에 연필의 재현 행위는 이미 `자연` 세계 너머에서 이루어진다.



동양 사람들은 `문화(文化)`란 말을 `글자로 된 세계`라는 뜻으로 새겼다. 그런 점에서 연필은 자연인으로서 태어난 어린아이가 문화적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최초로 만나는 가장 중요한 문명 사물이다.


도시 아이들 연필은 `토이스토리`에 등장하는 인형과 같은 운명을 겪는다. 아이가 손에 쥐었던 최초의 문명 도구는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샤프펜슬과 볼펜 등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미대생들 데생과 크로키에 샤프펜슬이나 볼펜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필자도 정신을 집중한 독서 속 메모, 예민한 감각과 첨예한 사유를 동원해야 하는 원고노트와 강의노트에 어김없이 샤프나 볼펜이 아니라 연필을 사용한다. 이 상황에서 생각을 매개하는 손은 샤프나 볼펜의 매끈한 감촉을 싫어한다. 왜일까?

이 단순한 사물의 구성물이 수상하다. 몸통은 나무다. 한가운데에 박힌 검은 심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순수한 흑연이 아니다. 흑연은 70% 정도고 30%는 진흙이다. 광물과 땅을 섞어서 빚고, 그걸 불과 뜨거운 공기에 구워 만든 `토기`가 바로 연필심이다.



고대 시칠리아 자연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이래 서양인들은 2000년 동안 `물ㆍ불ㆍ흙ㆍ공기`를 우주의 기본 원소라고 생각했다. 현대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를 물질적 이미지의 4원소라고 불렀다. 그건 쇠와 흙과 물과 불과 나무를 오행의 원소로 본 동양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연필을 쥔 손은 머리보다도 먼저 우주와 상상력의 기본 원소들과 접촉하는 원초적 느낌을 아는 게 아닐까. 첨예한 사유와 예술은 `문명`을 무너뜨리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건 존재의 근원과 만나는 예감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탄생하는 건 자연이 아니라 전위의 `문화`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매일경제, 2013.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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