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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분노사회에 답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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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29 15:15 조회21,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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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압축성장으로 경제적 기적을 이뤘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사람들일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여러 해 이곳에 근무하면서 관찰한 모습은 달랐다. 많이 지쳐 있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한 서방 외교관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 열심히 뛰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행복도는 그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며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서 전력을 다해 달려왔지만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대다수 젊은이에게 괜찮은 일자리는 그림의 떡이고, 취약한 사회안전망은 은퇴자들의 미래를 보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자신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경쟁사회에 밀리고 지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을 패배자로 만든 사회에 대해,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 절망과 분노는 자살이나 타인에 대한 공격성의 증가로 나타난다. 실제로 지난 10년 사이 자살률은 100% 이상 늘었다. 자살 못지않게 타인에 대한 공격도 늘고 그 양태마저 극단화하고 있다. 얼마 전 온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묻지마 살인이나 최근 논란의 초점으로 떠오른 일베현상이 단적인 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란 커뮤니티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폄훼해 물의를 빚은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일베충’이라고 비하하는 우리 사회의 패배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거나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짓밟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사회가 비판적으로 반응하면 할수록 쾌락이 배가되기에 가학적 언어폭력의 수준을 높여온 것이 논란으로 비화했다. 따라서 이런 일베현상을 일베충의 일탈이나 표현의 자유 문제로만 보는 것은 단견이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심각해진 분노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을 완화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등 제도적 측면의 노력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고통의 뿌리를 응시하게 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달 초 한국을 방문했던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일은 내면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했다. 내면의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비로소 그 고통이 다른 누구 탓이 아니라 무조건 경쟁지상주의를 수용하고 내달려온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고,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이 깊은 만큼 우리 사회의 치유에 대한 갈망도 높아지고 있다. 힐링(치유)이란 문패를 단 프로그램이나 책이 상한가를 치고 틱낫한 스님의 강연에 수만명이 모여든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갈망에 응답한 것은 종교단체 등 민간부문이었다. 또 그런 프로그램이나 책이 제도적 측면의 대책보다 당장의 고통을 회피하는 당의정만 제공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정치의 목표가 국민의 행복 증진이라면, 이렇게 분노와 고통이 팽배한 사회를 치유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일감이다. 상처받는 이들을 줄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분노의 내면을 응시할 힘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시가 6월부터 힐링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반가운 까닭이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이름의 프로그램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정혜신 박사가 중심이 돼 치유활동가 500명을 양성하고 그 500명이 연말까지 서울시민 1만명을 치유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이 계획이 흥미로운 점은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치유활동가가 돼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공감 네트워크’로 확장해 나간다는 데 있다. 단순히 자기최면적인 힐링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새로운 정치의 모형을 제공하게 될지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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