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운] 꿈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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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21 15:09 조회30,2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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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설립된 중국 ‘한위판디엔(漢語盤点·국가언어자원감시및연구센터)’은 2012년 최고의 글자로 ‘멍(夢)’을 선정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올림픽의 꿈, 우주선의 꿈, 항공모함의 꿈, 노벨상의 꿈, 영미(英美) GDP 초월의 꿈들이 최근 연달아 현실화되면서 국운이 때를 만났음에 전문가와 네티즌이 뜻을 모았다고 한다. 특히 작년 11월 시진핑(習近平)이 ‘부흥의 길(復興之路) 강화’에서 ‘중궈멍(中國夢)’을 언급한 이래 ‘차이니즈 드림’은 일순 세간의 화두로 떠올랐다.
차이니즈 드림 둘러싼 갈등 노출
원래 ‘차이니즈 드림’은 작년 18대 전대회(全大會)를 앞두고 토마스 프리드만이 뉴욕타임스에 쓴 말이다. 번영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지속 가능한 사회비전의 조화로운 결합이 중국의 새로운 꿈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데 시진핑의 ‘꿈’은 다소 달랐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실현이 곧 중화민족의 위대한 꿈”이다. 관방매체들은 중국의 부흥과 굴기가 바로 중국의 꿈이며 먼저 국가가 부강해야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며 뒤질세라 새 지도자의 꿈에 거룩한 해몽을 덧붙였다.
분명 ‘강국의 꿈’은 아편전쟁(1840년) 이래 중국인의 일치단결된 꿈이었다. 사회주의 시대 ‘차오잉간메이’의 꿈을 위해 전 인민이 고난의 대약진을 감내했다면 개혁개방 후엔 샐러리맨과 농민공이 시장경제체제 최전선에서 민족중흥의 꿈에 피와 땀을 보탰다. 이제 2020년 전면적 ‘소강(小康)사회’의 꿈을 앞두고 막판 질주를 벌일 태세다. 그러나 이런 강국의 꿈이 희망보단 절망을 가져왔다는 인식이 최근 사회 저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인터넷 매체의 최고 유행어 ‘댜오쓰(돈 없고 전망 없는 싱글남)’와 ‘가오푸샤이(高富帥·잘 생기고 집안 좋은 매력남)’는 이런 절망의 희화화다. ‘댜오쓰’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오푸샤이’가 될 수 없는 현실을 꼬집는 자학유머들이 인터넷을 들썩였다. 경제학자 랑센핑(郞咸平)은 현재 중국은 봉건시대보다도 사회유동성이 경직됐다고 비판한다. 신분제 사회에서도 빈한한 집안의 인재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대, 칭화대 졸업생도 월급 이삼천 위안의 직장에 전전긍긍하는 지금 개천에서 용 나기란 이미 옛날 말이다.
진정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이 행복할까. 지금 중국은 ‘꿈’의 해석을 둘러싸고 전쟁 중이다. 지난주 영향력 있는 웨이보(微博) 논객 리청펑(李承鵬)이 팬사인회 중 성난 청중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이에 싼 식칼을 던진 이도 있었다. 저서 ‘전 세계가 모두 알고 있다’에서 리청펑은 쓰촨대 지진, 고속철도 붕괴, 멜라민 파동 등의 참상이 국가위신의 명목 아래 은폐되는 현실에 매섭게 날을 세웠다. 그가 내건 두 글자는 ‘존엄’이었다. 죽어서도 존중 받지 못하는 중국인의 운명을 개탄하며 그는 말한다, ‘개인의 존엄이 서야 국가가 아름답다’고. 지금 웨이보에는 매국노 리청펑은 맞아도 싸다는 쪽과 리청펑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쪽이 팽팽하다.
국가 위신 위한 현실 은폐 안돼
강국의 꿈으로 상처 난 곳은 중국만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은 성장과 복지 사이에서 국론이 양분되는 아픔을 겪었다. 오랜 침체 위로 엄습한 재난이 가져온 절망을 일본 국민은 강국 부활이란 전도된 꿈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작년 12월 미 NIC 보고서는 2030년 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을 합친 것보다 강해질 것이라 전망했다. 이것이 장밋빛 전망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의 꿈을 되돌아볼 때다. 새 정부 들어 ‘국민행복’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일단은 반가운 일이다. 개인의 존엄성이 인정받고 노력한 만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아름다운 나라의 구상이 들어 있기를 바란다.
백지운 서울대 연구교수 통일평화연구원
(국민일보, 2013. 1. 21.)
차이니즈 드림 둘러싼 갈등 노출
원래 ‘차이니즈 드림’은 작년 18대 전대회(全大會)를 앞두고 토마스 프리드만이 뉴욕타임스에 쓴 말이다. 번영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지속 가능한 사회비전의 조화로운 결합이 중국의 새로운 꿈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데 시진핑의 ‘꿈’은 다소 달랐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실현이 곧 중화민족의 위대한 꿈”이다. 관방매체들은 중국의 부흥과 굴기가 바로 중국의 꿈이며 먼저 국가가 부강해야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며 뒤질세라 새 지도자의 꿈에 거룩한 해몽을 덧붙였다.
분명 ‘강국의 꿈’은 아편전쟁(1840년) 이래 중국인의 일치단결된 꿈이었다. 사회주의 시대 ‘차오잉간메이’의 꿈을 위해 전 인민이 고난의 대약진을 감내했다면 개혁개방 후엔 샐러리맨과 농민공이 시장경제체제 최전선에서 민족중흥의 꿈에 피와 땀을 보탰다. 이제 2020년 전면적 ‘소강(小康)사회’의 꿈을 앞두고 막판 질주를 벌일 태세다. 그러나 이런 강국의 꿈이 희망보단 절망을 가져왔다는 인식이 최근 사회 저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인터넷 매체의 최고 유행어 ‘댜오쓰(돈 없고 전망 없는 싱글남)’와 ‘가오푸샤이(高富帥·잘 생기고 집안 좋은 매력남)’는 이런 절망의 희화화다. ‘댜오쓰’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오푸샤이’가 될 수 없는 현실을 꼬집는 자학유머들이 인터넷을 들썩였다. 경제학자 랑센핑(郞咸平)은 현재 중국은 봉건시대보다도 사회유동성이 경직됐다고 비판한다. 신분제 사회에서도 빈한한 집안의 인재들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대, 칭화대 졸업생도 월급 이삼천 위안의 직장에 전전긍긍하는 지금 개천에서 용 나기란 이미 옛날 말이다.
진정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이 행복할까. 지금 중국은 ‘꿈’의 해석을 둘러싸고 전쟁 중이다. 지난주 영향력 있는 웨이보(微博) 논객 리청펑(李承鵬)이 팬사인회 중 성난 청중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이에 싼 식칼을 던진 이도 있었다. 저서 ‘전 세계가 모두 알고 있다’에서 리청펑은 쓰촨대 지진, 고속철도 붕괴, 멜라민 파동 등의 참상이 국가위신의 명목 아래 은폐되는 현실에 매섭게 날을 세웠다. 그가 내건 두 글자는 ‘존엄’이었다. 죽어서도 존중 받지 못하는 중국인의 운명을 개탄하며 그는 말한다, ‘개인의 존엄이 서야 국가가 아름답다’고. 지금 웨이보에는 매국노 리청펑은 맞아도 싸다는 쪽과 리청펑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쪽이 팽팽하다.
국가 위신 위한 현실 은폐 안돼
강국의 꿈으로 상처 난 곳은 중국만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은 성장과 복지 사이에서 국론이 양분되는 아픔을 겪었다. 오랜 침체 위로 엄습한 재난이 가져온 절망을 일본 국민은 강국 부활이란 전도된 꿈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작년 12월 미 NIC 보고서는 2030년 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을 합친 것보다 강해질 것이라 전망했다. 이것이 장밋빛 전망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의 꿈을 되돌아볼 때다. 새 정부 들어 ‘국민행복’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일단은 반가운 일이다. 개인의 존엄성이 인정받고 노력한 만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아름다운 나라의 구상이 들어 있기를 바란다.
백지운 서울대 연구교수 통일평화연구원
(국민일보, 201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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