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시베리아의 리코프 가족에겐 인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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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7-01 16:23 조회25,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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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잊기 쉬운 점이 있다. 권리를 가진 사람, 곧 권리의 보유자 중심으로 인권을 이해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나’ 또는 ‘우리’가 이러저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인권은 강력한 도덕적 신념과 정의감에 기반한 개념이기에 권리 주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권리 개념의 구조적 특성을 기억한다면 권리 보유자 중심으로만 인권을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필자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자라던 시절엔 정보 접근이 요즘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독서물은 최고 수준의 지식을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와 같았다. 그런 전집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었다. <요크 출신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삶 그리고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라는 원제로 1719년 발표된 이 소설은 인권 공부 앞부분에 꼭 나오는 핵심 질문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인권이 있었겠는가? 없다고 하는 게 정답이다. 벨든 필즈는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상대방, 곧 의무의 담지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루소가 인권을 상상할 수 있었겠지만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는 없었던 존재로 보아야 한다. 의무를 진 책임 있는 상대가 없으면 권리도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권리는 두 사람 이상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 이상의 공동체가 성립되기만 하면 무조건 인권을 논할 수 있을까? 상응하는 권리-의무라는 형식적 차원으로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두 사람 이상으로 이루어진 원초적 공동체를 상상하면서 사고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한다. 역사상 희귀한 사례가 있다. 1978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질학자들이 철광을 찾기 위해 몽골의 북서부 국경 너머 러시아 영토 내부를 답사하고 있었다. 하카스 공화국 아바칸 강 근처, 타이가 침엽수림이 끝도 없이 펼쳐진 전인미답의 고산 지대였다. 헬기로 지형을 살피던 기장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해발 2000m나 되는 첩첩산중 한가운데 사람이 일군 밭고랑이 포착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약 3400㎞, 가장 가까운 인가로부터 250㎞나 떨어진 시베리아의 무인지대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인근에 착륙한 지질학자들은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걸쳐 놓은 오두막을 찾아냈고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을 확인했다.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의 열악한 조건, 답사팀장의 표현에 따르면 “중세의 토굴과 같은 환경” 속에 다섯명의 식구가 초근목피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 자작나무 이파리를 엮어서 걸친 누더기 복장, 날감자 이긴 것에 호밀과 대마씨를 섞어 만든 거친 음식, 그리고 아주 낡은 성경책 한 권, 이것이 그들 삶의 전부였다. 지질학자들과 맨 먼저 말문을 튼 사람은 카르프 리코프라는 여든에 가까운 노인 가장이었다.
답사팀이 가장 궁금해한 사항은 어째서,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 외딴곳에서 살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원래 리코프 가족은 러시아 정교회의 고신앙파에 속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고신앙파는 오랜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온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리코프는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개혁의 명분으로 기독교도의 수염을 자르게 했던 조처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며 치를 떨었다. 게다가 러시아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종교를 탄압한데다 스탈린 대숙청 때 리코프의 형이 죽임을 당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는 아홉살이던 아들과 두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무작정 시베리아 숲 속으로 피신했다. 피난을 감행한 때가 1936년, 더 깊은 오지를 찾아 헤매다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들, 딸 하나씩을 더 낳아 기르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고, 결국 아버지와 네 남매가 외롭게 살게 되었다. 답사팀이 이들을 만났을 때 막내딸의 나이가 벌써 서른다섯이었다. 지질학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리코프 가족이 시베리아로 숨어들어온 뒤 40년이 넘는 동안 자기들 외에 어떤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숲 속에서 태어난 두 자녀는 평생을 사람이라곤 오직 가족들만 알고 지낸 터였다. 그래도 부모의 독실한 믿음 덕분에 아이들은 성경을 통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또한 바깥세상의 ‘도시’라는 곳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을 포함해 그 누구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나 인공위성, 텔레비전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지질학자들은 여러 번 리코프 가족을 방문하면서 이들에게 외부 소식과 생필품을 전해 주었다. 한사코 선물을 사양하던 가족은 답사팀과 상당히 친해진 뒤에야 비로소 소금을 얻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카르프는 소금 없이 살았던 생활이 “고문 같았다”고 토로했다 한다. 이들은 문명세계에 나와 살기를 거부했지만 답사팀의 베이스캠프를 방문하기는 했다. 카르프는 셀로판 포장지를 “주름 잡히는 유리”라고 아주 경이롭게 여겼고, 막내아들 드미트리는 목공소에서 원목을 기계로 다듬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리코프 가족 이야기를 성석제 작가에게 했더니 자기 고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상주에 외서면 예의리라는 오지 마을이 있는데 6·25 때 하도 오래 소금장수가 오질 않아 주민들이 대처로 나가보고서야 전쟁이 지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리코프 가족의 경우 두 사람 이상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므로 권리-의무 관계가 설정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인권이 있었을까? 다시 말해 인간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인권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고,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리코프 일가에게도 인권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신의 모상을 타고난 존재이므로 서로 간에 존중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존중할 의무는, 역으로, 모두로부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리코프 가족 모두에게 신이 부여한 의무와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었다. 이것이 고대로부터의 자연법 전통에서 말하는 자연권이다. 의무 수행의 결과로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권리이긴 하나, 어쨌든 권리인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카르프가 자기 가족에게 자연법 사상에 의한 자연권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했을까? 자연법에 따르면 사람의 인식이나 의지 여부에 상관없이 자연권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지질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인은 엄격한 가장이었다. 만일 그가 자연법을 몰랐거나, 식구들에게 자연권을 장려하지 않았다면 가족 구성원들이 실제로 적극적인 권리를 누렸을 가능성은 낮았을 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자연법적 근거의 전통 자연권과, 계몽주의 이래 자연권의 수사를 받아들이면서도 세속화의 길을 걸었던 근대 인권이 갈라진다. 후자는 국가의 전횡과 폭정에 맞서 자유와 존엄을 요구했던 구체적 역사경험 속에서 싹트고 성장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근대 이후의 인권을 철저히 ‘정치적 기획’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코프 가족 안에서 자녀들이 일종의 미니 시민혁명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에 사랑은 있었을지 몰라도 근대적 의미의 인권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인권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또한 원초적 공동체가 형성된 뒤에도 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민의’ 정치적 기획이 추진되어야 인권이 존재할 수 있다.
사족. 리코프 가족이 세상에 알려진 후 1981년 큰아들과 큰딸이 연이어 신장염으로 급사했고, 둘째 아들도 폐렴으로 사망했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에 의한 감염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1988년 아흔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13년 일흔을 넘긴 막내딸 아가피아는 지금도 홀로 자기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요즘엔 그곳까지 사람들이 들어와 작은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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