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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적군묘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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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7-17 15:40 조회23,7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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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일선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는데, 후방의 우리 초등학교 4, 5학년짜리들은 아침 조회시간이면 이런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행진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초개’란 낱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 사어가 됐고 ‘오랑캐’ 역시 낯선 말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 군가에서 ‘오랑캐’는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병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선이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갔던 1950년 10월부터 1953년 7월 정전이 성립될 때까지 전투에 참가하여 15만 가까운 전사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국 1년밖에 안 된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는 건곤일척의 큰 모험이었다.

그 참전 중국인 세 사람이 60년 만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속칭 ‘적군묘지’를 찾았다. “적군의 유해를 고이 모셔준 한국에 감사한다.” “희생당한 전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청춘을 바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길 기원한다.” 80대 노인이 된 그들의 말 마디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지고 묘표를 어루만지는 손길 또한 깊은 감회를 전한다. 임진각에 온 그들이 역시 80대에 이른 한국군 참전 용사들과 포옹하는 광경을 보는 것도 가슴 뭉클한 데가 있다. 구상 선생의 시 <적군묘지 앞에서>가 노래한 대로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한-중 우호가 소리 높이 강조될수록 결정적인 배반감이 온몸을 아프게 치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 한때 오랑캐라 불렀던 중국인과는 이렇게 얼싸안으면서 피를 나눈 동족들끼리는 왜 매사가 툭하면 뒤틀리는가. 남과 북 사이에는 죽음으로써도 넘지 못할 무슨 철벽이 가로놓여 있는가.

1984년부터 10년간 독일(서독)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2009년 간행된 회고록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곁들여 독일 통일 과정을 돌아보고 있다.(탁재택 옮김,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 2012)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1939년 9월1일 독일군 병사의 일원으로 폴란드로 진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불행히도 바로 이튿날 같은 대대 소속의 작은형 하인리히가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사했고, 그는 밤새 형의 시신을 지켰다. 그는 이 충격이 자신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정계에 입문한 동기의 하나도 그 비극과 관련이 있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1973년 서독 국회 대표단의 첫 소련 방문에 바이츠제커도 동행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대표단은 피스카렙스코예 공동묘지를 방문한다. 거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47만명의 유해가 묻혀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저지른 거대한 야만의 일부였다. 그날 저녁에는 레닌그라드 정치국의 초청행사가 마련되었고 바이츠제커에게는 초청에 대한 답례인사 차례가 주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이 젊은 보병으로 참전하여 레닌그라드 공방전투에서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인 사실을 고백하고 “우리가 과거에 직접 경험한 것을 우리 후대에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말한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소련 쪽 인사들은 바이츠제커의 생각을 수용했고, 점점 더 솔직한 대화가 이어졌으며, 결국 그날의 행사는 놀랍도록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든 이념적 편견과 국가주의적 타산을 버리고 진실하게 적군묘지로 가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평화전략임이 입증된 것이었다.

1987년 여름 바이츠제커는 서독 대통령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회담 말미에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동서독 문제를 언제까지 방치해둘 거냐고 다그치듯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역사에 그 해답을 맡겨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남짓 뒤 역사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라는 답을 보여주었다. 다시 1년이 지나 러시아 군부대가 동독지역에서 철수할 때 바이츠제커는 통독 대통령의 자격으로 러시아군을 환송하며 독일 땅에 묻힌 수많은 러시아 전사자들을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들의 전사자들은 우리의 전사자들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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