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복지 증세와 중산층의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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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8-19 14:37 조회22,9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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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계의 석학인 아이버슨과 소스키스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등의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는 국가에선 중도우파 정부가 지배적이며,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에선 중도좌파 정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45년에서 1998년 사이 17개 선진 민주국가에 들어섰던 모든 정부의 이념 성향을 분석한 그들의 2006년 연구에 의하면 단순다수제 국가에선 정부의 약 75%가 중도우파였던 반면, 비례대표제 국가에선 약 74%가 중도좌파였다. 그리고 복지 수준은 당연히 중도좌파의 성격이 강한 비례대표제 국가가 월등히 높았다.
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단순다수제 국가에선 중도우파 정당들이 그토록 우세한 것일까? 아이버슨과 소스키스는 세제 정책에 대한 중산층 유권자들의 선호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주지하듯,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으로 구성되는 양당제를 촉진한다. 말하자면 좌우의 대표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념적 존립기반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간지대에 위치한 중산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는 형태의 경쟁체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양자택일의 선거정치 구도에서 중산층 시민들은 더 많은 경우에 중도좌파보다는 중도우파 정당을 선택하곤 한다. 무엇보다 중도좌파 정당의 집권 후 ‘좌경화’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민주주의에선 일단 선거가 끝나고 나면 집권당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상당하다. 중도좌파 정당이 그러할 경우 그것은 복지국가 기조의 급진적 강화와 그에 따른 대규모 증세로 이어질 수 있다. 중산층 시민들이 과도하게 늘어날 세 부담을 걱정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중도우파 정당은 집권 후 ‘우경화’할지라도 조세부담을 크게 늘릴 까닭이 별로 없다. 우경화의 핵심은 ‘작은 정부’ 지향과 자유시장 정책의 강화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산층 유권자들은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대체로 중도우파 정당을 지지하게 된다.
그렇다고 중산층 시민들이 복지국가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들 다수는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점진적·단계적 건설과 그 유지를 지지한다. 물론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우선 증세를 요구하지만, 필요하다면 자신들에 대한 복지증세도 그것이 점진적·단계적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반대하는 건 급진적이거나 불공평한 증세조치다. 과도한 세 부담을 부과하지 않으리라 보이는 중도우파 정당이 점진적 복지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울 경우 중산층 유권자들의 표가 몰리는 까닭이다. 2012년 한국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한 까닭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선거 당시의 중도우파 기조를 유지했다면 중산층의 지지는 계속됐을 것이다. 그러나 8월8일에 발표된 세법개정안은 중산층 시민들로 하여금 이 정부는 오직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만을 수호하는 ‘특권층 정부’라고 판단케 했다. 그것은 ‘증세 없는 복지확대’를 약속한 정부가 실질적인 증세 조치를 택한 것일뿐더러 그 부담은 고스란히 중산층에만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산층의 이반 조짐은 급격히 일어났고 이에 당황한 정부는 원안 발표 4일 만에 급조된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수정안은 세 부담이 늘어나는 중산층의 규모와 그 액수를 줄인 것일 뿐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부담 강화는 여전히 포함하지 않았다. 많은 중산층 시민들은 오히려 수모를 당한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자신들이 돈 몇 푼 아까워 복지확대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속상했을 것이다.
다수의 중산층 시민들이 바라는 일은 아무래도 비례대표제의 강화가 선행될 때 이루어질 듯하다. 비례대표제가 강화되어 중산층을 전적으로 대표하는 유력 중도정당이 부상하고, 그 정당이 저소득층을 대표하는 좌파정당(들)과 연립하여 중도좌파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 빈번히 그리고 연이어 일어날 때 복지국가의 점진적·단계적 건설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아이버슨과 소스키스의 연구가 한국에 주는 함의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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