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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쌍팔년도 민주주의와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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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4-17 14:24 조회18,2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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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폐업이 큰 정치적 현안으로 부상했다. 김용익 의원은 “공공의료체계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국회 본관 입구에서 며칠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문희상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도 “폐업 조치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의 농성장 격려 방문이 줄을 이었다. 조만간 진주의료원은 ‘공공의료 사수 투쟁’의 성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국회 청문회는 따놓은 당상이다. 국정감사 요구도 나올 것 같다. 익숙한 장면이다. 2009년 쌍용자동차, 2010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건 이후 벌어진 일련의 투쟁 과정에서, 덕수궁 앞 농성장에서 많이 보았으니까.

정치인과 시민단체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이 사업장의 해고·폐업이 ‘천하에 몹쓸 짓’이라는 판단도 깔려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사건의 맥락이나 큰 그림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지방의료원의 도미노식 폐업, 공공의료체계의 붕괴, 정리해고의 만연화로 인한 고용불안의 심화 등일 것이다. 이는 거시적 안목과 빼어난 통찰력의 산물일 수도 있고, 게으른 실사구시와 이데올로기적 편견의 산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주요한 측면인지는 접어두자. 다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짜 큰 그림은 한국 사회가 엄청난 구조조정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조 교수에 따르면 부가세를 내는 사업자 중에서 매년 폐업 비율이 20% 안팎이다. 법인 사업자의 폐업 비율도 매년 10% 정도다. 비교적 견실한 기업인 상장회사 중에서도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기업이 20~30%다. 이 중에는 코닥, 노키아처럼 기술 패러다임이나 소비자 요구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기업도 있고, 한진중공업, 에스티엑스(STX)조선해양, 남해안 중소 조선소들처럼 세계적 조선산업 불황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기업도 있다.

사유가 무엇이든, 노동자의 책임이 있건 없건, 경영자 인책, 조업 단축, 라인·공장 폐쇄, 정리해고 등 회생·재기의 몸부림은 피할 수 없다. 한국은 높은 무역의존도와 중국에 인접한 지경학적 조건으로 인해, 정부 주도 발전 전략과 무능 정치의 유산인 방만한 공공부문으로 인해, 또 제한 없는 소비자 선택권-아프면 인근 대학병원이나 서울의 유명 병원으로 달려간다-과 비합리적인 수가체계 등으로 인해 구조조정 압력이 어떤 나라보다 거세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몇몇 대형 사업장의 해고·폐업 저지에는 관심이 많지만, 수백수천만명의 구조적·숙명적 고통·불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명퇴금은커녕 임금과 퇴직금 체불 상태로 길거리로 내몰리는 영세기업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튼실한 고용보험에 대한 무관심이 그 예다.

그런데 민주주의, 안보, 통일, 교육만큼이나 합리적이고 원활한 기업·산업 구조조정은 중요하다. 이는 단결투쟁의 문제도, 법적 해고 요건의 문제도, 복지의 문제만도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합리적 격차, 즉 생산성에 조응하는 공평한 처우가 핵심이다. 잘 작동하는 재교육·전직 시스템도 중요하다. 민간기업과 달리 시장(경쟁자)의 견제를 받지 않는 공공부문의 경영 및 근로 조건 합리화와 노조 관행의 변화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도 부정, 폭력이 난무하던 쌍팔년도(단기4288년=1955년) 식이 있다. 구조조정 갈등도 그렇다. 정리해고를 건너뛰어 폐업으로 직행하고, 평소 경영 합리화를 백안시하다가 일 터지면 결사투쟁하는 또다른 쌍팔년도(1988년) 식이 있다는 얘기다. 한국 민주주의는 단기 쌍팔년도를 벌써 벗어났지만, 현세대와 미래 세대의 밥그릇, 기회, 희망이 달려 있는 구조조정은 서기 쌍팔년도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만큼 구조조정의 선진화도 필요하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한겨레, 201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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