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까마귀의 눈을 느끼며 이상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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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06 15:42 조회19,1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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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식민지시대 시인 이상이 1934년 신문에 발표한 ‘오감도-시 제1호’다. 전통시의 어법에서 파격적으로 벗어난 이 모던한 시는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어 결국 오감도 연작은 다 발표되지 못하고 중단된다. 그렇지만 이후 이 작품은 현대인의 불안감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로 문학사에 자리 잡았다.
이 유명한 난해시를 떠올린 것은 최근 학생들과 교실에서 이 작품을 읽다가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현실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막힌 도로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근래 학교폭력 때문에 일어난 중·고등학생들의 잇따른 자살 사건과 겹쳐진 것이다. 학교라는 틀 속에서 호소할 곳 없는 폭력에 노출된 학생들이 어느 날 옥상에서 투신하고 홀로 방에서 수면제를 털어넣는다. 막다른 골목에서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고 만다.
사랑에 실패하여 자살한 베르테르도 있고 자신의 주체성을 입증하기 위해 목숨을 끊은 몽상적 허무주의자 키릴로프도 있다. 혹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살이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그 독자적인 결단이 실은 자유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이 타율적으로 강제한 것임은 명백하다.
첫 연에 이어 “제1의 아해”부터 “제13의 아해”까지 하나같이 무섭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로 그렇게만 모였다고 시인은 말한다.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이 공존하는 학교사회, 가해학생이 피해학생이 되고 피해학생이 가해학생이 되기도 하는, 그 학교폭력의 현장이 바로 이상의 ‘오감도’의 세계이기도 함을 우리는 느낀다. 식민지시대의 상황이나 현대인의 공포를 그린 면도 있겠지만, 그것은 참혹한 우리 교육현실의 적나라한 묘사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아이들의 질주를 내려다보고 있는 까마귀(烏)의 눈이다. 이 눈의 존재가 바로 식민권력의 감시체제를 은유하는 것이라고 볼 소지는 크다. 푸코가 원형감옥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권력의 작용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그 내면까지 지배한다. 아이들끼리 서로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는 그 공포와 폭력의 도가니는 결국 권력이 이들의 내면에 미세하게 퍼뜨려놓은 통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학교폭력과 학생들의 자살에 대해 많은 진단과 처방이 내려졌다. 요즘 학생들의 정신적 나약함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가 원인임이 지적되기도 한다. 어떤 승려는 학생의 자살을 그치게 하기 위해 맨발로 국토횡단을 하는 고행을 선언하기도 한다. 국가기관도 가만 있지 않는다. 경찰청은 감시의 부족을 말하며 학교 안팎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교육부는 폭력과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지도와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그러나 구조적인 데서 발생한 아이들의 공포를 선도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통제 때문에 무서워진 아이들을 다시 CCTV로 감시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문제는 결국 학교사회를 경쟁으로 몰아넣은 사회의 구조요, 그런 경쟁논리를 강화하려는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민주화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룩해나가자는 지향이 좌절되고 기득권과 위계질서가 강조될 때, 까마귀의 음산한 시선 아래 미시 차원의 인간관계도 그런 권력의 속성을 되풀이하게 된다.
최근 보수정권이 재창출된 이후 ‘혁신학교’의 기획이나 ‘학생인권조례’ 등의 개혁조치들을 무산시키려는 정치권력이야말로 이 모든 아이들의 질주와 무서움의 배후에 도사린 까마귀의 눈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학교라는 골목을 벗어난다 해도 그 벗어난 공간 자체가 이미 더 큰 폭력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상은 이 시를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길은 뚫린 길이어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윤지관(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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