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그가 정보기관을 믿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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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7-17 15:27 조회23,4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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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보기관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다. 정보요원들은 불쌍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 하나는 그들이 실제로 수행한 일에 대해 결코 공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발병한다. 그건 그들이 ‘음지’에서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일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영혼이 변형된다. 또 한가지 병은 그들이 자기 나라의 국익을 정부보다 훨씬 잘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 때문에 발생한다. 이 두번째 병 때문에 나는 정보기관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13년 동안 연방정부에 참여했지만, 정보기관의 장을 만난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그것도 10분 동안. 그 사람이 내가 알았던 유일한 정보기관 요원이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독일 국방장관과 재무장관을 거쳐 총리를 지낸 헬무트 슈미트의 말이다. 퇴임 후 군산복합체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아이젠하워처럼 그도 자기 정부 산하의 기구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슈미트가 재임하는 동안 독일에서는 적군파의 테러와 납치로 사회가 심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 자신과 부인도 납치 위협을 느꼈고, 납치될 경우 절대 테러리스트의 요구에 응하지 말라는 문서를 남길 정도로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때 그가 얻은 깨달음이 바로 정보기관은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했을 때 도달한 결론이 정보를 캐내서 제공하는 곳을 믿어선 안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그들이 민주주의 원칙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이해하는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는 통찰을 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민주주의를 신봉한 그였기에 그들의 속성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우리 대통령은 그런 통찰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소동이 일어났을 때 든 생각이다. 재임 중에 중앙정보부 출신 국정원장의 이상한 돌출행동도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국정원과 그 국정원장을 믿고 정상회담 회의록 정리까지 맡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그곳에 한 부를 보관하게 했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 회의록은 대통령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는데, 국정원에 한 부 던져놓아서 이를 어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도 이상하고 한탄스럽다.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퇴임한 국정원장에 대해 이제 와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지만, 그때 그들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 ‘선용론’을 앞세워 너무 쉽게 정보기관을 믿었던 것이 이런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국정원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처럼 만들어달라.” 대통령이 국정원장에게 당부한 말이라고 한다. 유능한 정보기관이 되라는 뜻일 텐데,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모사드에는 보편적 인권 개념이 없다. 그들이 생각하는 ‘국익’에 방해된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제거한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향한다면 나라 안에서는 물론이고 나라 밖에서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을 ‘국익’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고려하지 않는 유능한 정보기관. 그냥 보통 정보기관보다 결코 나을 것 같지 않다.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면에서는 국가 테러리즘이 더 심하다.” 헬무트 슈미트가 도달한 또 한가지 통찰이다. 독일 총리로 일하는 동안 세계 각국의 정치가와 정보기관을 경험한 후에 얻은 결론일 것이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마 세계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정보기관들의 활약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다. 그것보다 국정원에 대한 우리 생각을 개혁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정보기관은 ‘음지’에서 일한다. 개혁한다고 해도 ‘양지’로 끌어내지는 못한다. 신뢰할 기관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음지’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통제와 감독이 어려운 곳이다. 그러므로 최선은 정보기관을 없애는 것이고, 차선은 정보기관을 여럿 두어서 ‘음지’를 작게 쪼개놓는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교양문화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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