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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시온 장로들의 의정서 혹은 대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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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8-02 15:28 조회33,7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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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세르게이 닐루스는 그의 저서 <미약함 속의 창대함> 안에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라는 위서를 집어넣었다. 프라하의 묘지에 모인 유대교 장로들의 대화 속에 드러난 세계 정복 음모를 내용으로 하는 ‘의정서’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유대인 음모설을 떠받친 중요한 문서였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문서의 계보를 추적하는 논문을 쓴 바 있다. 하지만 학술적인 연구로는 확인되지 않는 빈 고리가 여럿 있었다. 에코는 이 빈 고리를 소설을 통해서 메꾸어보려 했다.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꾸물꾸물 성장했던 유대인 음모론의 빈 고리들을 허구로 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 인물을 창안하고 그로 하여금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빈 고리의 바로 그 장면에 출현하게 하면 된다. 그렇게 쓰인 소설이 <프라하의 묘지>이다.


음모론을 모방하며 음모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소설에는 음모의 일반적 프로토콜(의정서) 또한 여럿 삽입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흥미롭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일들과도 잘 들어맞는다. 예컨대 이런 구절을 보라. “정부의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릴 때 쓰일 만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게 어떤 문서이든 정보기관 사람들에게 언제나 도움이 된다.” 정국을 흔드는 문서… 그 문서가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와 마찬가지로 대화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어떠해야 할까?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인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엔엘엘(NLL)을 폐기했다는 이야기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누리당 의원들은 “맞아, 노무현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음모와 문서에는 ‘신뢰 프로세스’도 필요하다. “폭발성이 강한 정보들은 한꺼번에 제시하는 게 아닐세. 사람들은 첫 충격이 가시고 나면 다 잊어버리거든. 그런 정보들은 조금씩 흘려야 하네. 그러면 새로운 정보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앞서 나온 정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지.” ‘카더라’ 식의 이야기에서 발췌록을 거쳐 발췌록의 원본으로 논란을 증폭해 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엔엘엘 주변에 무언가 구린 것이 있다는 인상이 신뢰를 얻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음모를 제조하는 자의 자기최면 과정이기도 하다.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니니 대위는 ‘의정서’ 집필을 끝낸 뒤 이런 감상에 빠진다. “유대인의 신의 없음에 대한 나의 원한, 나의 앙심은 추상적인 관념에서 억누를 길 없는 격렬한 감정으로 변했다. 오호라, 정녕 프라하 묘지의 그 밤이 필요했다. 그 사건에 관한 증언을 작성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왜 그 저주받은 종족 때문에 우리 삶이 오염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자기최면을 통해 음모론자들의 목소리에는 확신의 힘이 어른거리며, 그들의 발언을 취재하는 기자들조차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끝으로 시모니니 대위는 말한다. “원본이 존재할 때 위조본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음모의 문서들은 원본을 자처하지 않는다. 원본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원본에 도달하지 못한다. 지금 국가기록원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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