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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총독의 소리'가 전하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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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10 16:27 조회22,3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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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이것은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 서두이다. 낯선 문체가 말해주듯 작품의 설정이 아주 이색적이다. 일본제국이 패전한 뒤 조선총독은 순순히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20여 년째 식민지 회복을 위해 지하활동을 벌인다는 가공적 설정인 것이다. 작가는 조선총독이 지하요원들에게 보내는 비밀방송의 형식을 빌려 한반도의 뒤틀린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연작이 처음 발표된 것이 1967년이므로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여진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 점을 상기하면서 ‘총독의 방송연설’ 앞부분을 조금 살펴보자. 패전 당시 일본 군부는 미군이 본토상륙 즉시 대학살을 자행할 것으로 믿었고, 한반도에서 철수할 때도 격렬한 보복이 있으리라 겁을 먹었다. 독일군이 불과 4, 5년의 점령 후 프랑스에서 물러날 때 현지인들의 ‘잔악한 습격’을 받았으니, 40년의 통치 끝에 쫓겨나는 일본인에게는 오죽하랴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반도인은 자기들을 “웃으며 보내주었고” “피해 입은 내지인은 거의 없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이 땅에 남기로 결심한 것도 조선인의 온정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소설 속의 총독은 말한다.


물론 황당무계한 소설적 가상이다. 실제로는 8·15 직후 도처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지휘하에 주민자치조직이 결성되었고, 일부 흥분한 군중들은 지휘부의 질서유지 호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식민지 해방과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이 온 나라에 끓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의 드러난 일면이었다.


당시의 자료들을 모은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라는 책에 보면 ‘조선헌병대 사령부’ 명의의 <내선 관민(內鮮官民)에 고함>이라는 일본어 포고문이 실려 있다. 포고문 제2항은 “조선이 독립한다 해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이 내지로 철수하기까지는 법률과 행정 모두 현재대로다”라고 되어 있다.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 인수인계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행정과 사법의 모든 권한이 일본에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실제로 1945년 9월8일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선포한 미군 사령부는 국외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국내의 자생적인 치안조직도 해산시켰다. 반면에 그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9월29일치 미군정 포고문을 통해 그때서야 일본인 대신 조선인 경찰관으로 교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경찰관 중에는 독립지사들을 고문한 악질분자도 섞여 있었다. 해방 직후 군중을 피해 숨었다가 미군정을 믿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식민지 체제의 모세혈관을 구성했던 조선인 행정관료들도 대부분 원래의 직책으로 복귀했다. 한국 기득권 구조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한일협정이 타결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렇다면 <총독의 소리>에 역설적으로 묘사된 일제 잔재는 얼마나 청산되었는가. 미군의 초토작전에 대한 공포심으로 떨던 일본에서는 이제 위안부를 모욕하는 망언까지 나오는가 하면 전쟁을 합리화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한국 학자들 자신이 하더니, 이제는 식민지 체제의 청산 노력을 반미용공의 시각에서 왜곡하는 역사서술조차 중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할 모양이다. 주권 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지하의 선열들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나,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친일 기득권 세력의 독점에 대한 저항의 과정이 민주주의의 실현 과정이고 또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정체성의 형성 과정임을 잊어선 안 된다. 민주주의에 헌신할 결의를 가진 사람만이 “김일성 체제는 우리 제국의 국체를 작은 규모에서 본뜨고 있는 상징적 천황제”라는 <총독의 소리>의 북한 비판에 동조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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