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언젠가 찾아올 초월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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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18 15:23 조회20,6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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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유미리는 유명한 재일동포 작가이다. 연극을 하다가 소설로 전향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그 대부분이 한국에서 번역되었다. 하지만 나는 유미리에 관해 막연한 지식만 갖고 있을 뿐, 작품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초에 그의 북한 방문기 <평양의 여름휴가>를 다룬 기사 제목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선입견 빼고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 방북”(<한겨레> 2013.1.7)했다는 기사가 그것인데, 이것은 유미리에 대해 선입견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내 의표를 여지없이 찔러왔다.
마침 뉴스에서는 북한의 핵실험 사실이 요란하게 보도되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의 진정을 위해 유미리의 방북기를 펼쳐들었다. 주위 모든 나라들의 만류와 경고를 무릅쓰고 핵도박을 감행한 북한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작금의 상황은 전문가들이 해설하듯 북-미 협상 국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최종적 파국을 향해 돌이킬 수 없는 한걸음을 떼어놓은 것인가. 물론 나는 <평양의 여름휴가>라는 책에 이런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 같은 것과는 너무도 멀게 살아온 일탈의 경력이 오히려 이 예민한 작가로 하여금 남이 못 본 것을 보게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은연중 품었다.
유미리는 2008년 10월, 2010년 4월과 8월, 이렇게 세 번 방북했다. 세 번째는 열 살 난 아들까지 데리고 갔다. 그런데 독자의 입장에서 뜻밖인 것은 유미리의 반응이었다. 북한에서는 관광이든 취재든 안내인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데, 그는 자유분방한 소설가답지 않게 아주 순종적이었다. 길에서 안내인이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라고 주의를 줘도, 서서 찍으면 괜찮은가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보았고 달리기가 취미인 유미리로서는 평양 거리와 대동강변을 달려보는 것이 소원인데, 그것이 허락되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규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그의 내면의 문이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새벽에 깨어나 호텔방 창문을 젖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온몸을 훑어내리는 것이 느껴졌고, 해질 무렵 대동강 가를 걸으면서 구경한 소소한 광경들이 “오즈 야스지로의 초기 무성영화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슴에 사무쳐” 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민족의식에 기인하는 감정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데라시네’(뿌리 없는 풀)라고 여겨오던 그가 마침내 뿌리내릴 땅을 찾은 듯한 원초적 귀속감에 휩싸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유미리의 방북기에 이런 감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판문점을 방문했을 때 만난 인민군 중좌의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여섯 살 때 가족과 친척 열한 명이 미군에게 몰살되고 혼자만 시체들 틈에 숨어 살아남았다. 고아로 자란 그는 후일 다섯 아들을 모두 군에 입대시켰고, 중좌는 “통일되는 날까지 군복을 벗지 마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군에 복무중이었다. 먼저 방문했던 신천박물관에서 그는 1950년 미군에 의해 주민 3만5383명이 학살당한 증거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전시물 앞에서 유미리는 숨쉬기도 힘든 고통을 느꼈고, 안내인은 “우리나라는 두번 다시 다른 나라에 침략당하지 않기 위해 군비를 갖추어왔습니다”고 설명한다.
민족의 파멸조차 불사하겠다는 듯한 북한의 비이성을 단지 전쟁의 트라우마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과격한 언사가 무모한 도발인지 계산된 전략인지도 좀 더 지켜볼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유미리가 아들과 함께 방문한 판문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하는 것을 읽으며, 거기서 당면의 위기를 넘어설 영속적 지혜를 보았다. “갈등과 충돌은 적지 않을 테지만, 조선민족이 ‘분단’이라고 하는 ‘한’을 초월할 날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렵다 하더라도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아들은 반드시 다시 이 땅을 방문할 것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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