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테러는 미친 짓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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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4-24 16:49 조회18,5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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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활짝 핀 봄꽃들을 보며 걷다가, 집에 들어오자 테러 뉴스로 가득 찬 신문을 펼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니, 괴롭다기보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혼돈에 사로잡힌다. 어느 쪽이 내가 서 있는 현실인지 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각의 화면에 떠오른 두 이질적 대상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는 인식작용에 착오가 발생하고 있다고나 할까.
문득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한 대목이 떠오른다. 6·25전쟁으로 한창 피난하던 중에 주인공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으슥한 데서 시간을 보내는 고난을 이어간다. 국도 연변 마을은 모조리 불타고 부서져 쑥대밭이 되어 있는데, 어느 날 그는 마을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주인공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나온다.
누가 미쳤다는 것인가. 박완서의 통찰이 빛나는 것은 비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나무를 “얘”라고 의인화한 게 아니라 거꾸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명은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고 꽃망울이 부푸는 자연의 질서에 대비될 때 인간의 폭력행위는 명분이 무엇이든 광란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보스턴 마라톤대회를 피로 물들인 테러도 변명의 여지 없는 범죄다. 그것은 모든 테러가 그렇듯 광기의 발로이고 맹목의 소산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 주류 언론에서 하고 있듯이 범인 형제의 사생활을 들추고 그들의 행동을 극화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사건의 전체적 맥락을 은폐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형은 죽었으므로 말이 있을 수 없고, 아우도 중상이므로 입을 열기 전에 온갖 추측보도의 홍수에 휩쓸릴 것이다. 이미 그들 차르나예프 형제는 사법적 판단이 착수되기도 전에 어떤 일방적 관점에 의해 절반쯤 악마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스턴 테러 자체보다 테러 배후에 있는 구조적 불의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보도를 보면 차르나예프 형제는 러시아 국적의 체첸계로서 1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와 영주권을 얻었다고 한다. 형은 권투선수이고 아우는 의학도로서, 형제의 기질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주위의 평판은 비교적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던 평범한 이주민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청년들이 이처럼 끔찍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게 되었는가. 이 비밀을 푸는 것이 바로 테러를 근절하고 미국이 더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돌이켜보면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했어야 할 가장 요긴한 작업은 상식적인 말로 해서 자기반성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이 한 일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무력침공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2011년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미국의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며칠 전 이라크전쟁 10돌 기자회견에서 “만약 이라크에 정말 대량살상무기가 있었다면 미국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어찌 됐든 미국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는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고 168만명의 난민과 500만명의 고아가 생겨났으며, 한마디로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났다. 9·11 테러가 비록 엄청나다고 하지만, 어찌 이라크가 당한 국가적 참화에 비할 수 있겠는가.
강자의 폭압이 지속되는 세계에서 약자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보스턴 테러의 근원에 있는 것은 체첸 민족주의도 아니고 이슬람 극단주의도 아니다. 범죄적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의 정서야말로 그 뿌리다. 다만 정의에 대한 열망이 테러와 같은 자기부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순진한 소리지만 꽃의 마음으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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