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명저 새로 읽기]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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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22 18:54 조회20,9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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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문화’로 읽어낸 자본주의의 근원적 공간 분할
도쿄대학 교양학부(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의 홈페이지 주소는 ‘www.c.u-tokyo.ac.jp’이다. 여기에서 교양학부의 코드를 나타내는 ‘c’는 ‘culture’의 첫 글자인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culture’가 ‘교양’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흔히 ‘문화’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사실 20세기 초반까지는 속된 말로 ‘재수 없는’ 귀족 취향의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culture’란 언제나 이른바 ‘고급문화’를 의미했던 것이다. 학부 1, 2학년을 대상으로 언어, 철학, 역사, 기초과학을 가르치는 도쿄대학 교양학부의 코드가 ‘culture’의 ‘c’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학부 1, 2학년을 대상으로 ‘고급문화’의 취향, 다시 말해 ‘교양’인으로 키우기 위한 교육과정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런 ‘culture’가 현재와 같이 고급·하위를 막론하고 모든 ‘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신좌파 계열의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상층 계급에 국한된 고상한 콘텐츠와 그 취향을 ‘문화(culture)’로 한정 짓는 영국 고유의 전통을 비판하고, 노동계급 등 일반 대중에게도 세계의 삼라만상을 해석하고 향유하는 고유한 취향의 전통이 있음을 설파하면서 시작되었다. 리처드 호가트와 E P 톰슨 등 문학이론에서 역사학을 망라한 이 신좌파 계열의 연구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복지국가의 등장과 노동계급의 정치적 부상이란 배경 아래, ‘대영제국’을 지탱해왔다고 간주된 찬란한 ‘고급·교양’ 취향으로서의 ‘문화’를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세계관을 통해 해방시킨 셈이다. 이후 이 흐름은 ‘문화연구’란 분과 학문으로 발전하여 20세기 후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제적’ 연구의 선구적 영역으로 확립되어 탈경계화된 지식 창출을 주도하게 된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란 이름은 이러한 매우 정치적인 이론과 비평의 흐름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이미 <문화와 사회>나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등 문화연구 분야의 고전이라 할 만한 그의 주저가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으나, 이번에 출간된 <시골과 도시>(나남)는 그의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문화관이 어떤 삶의 경험 속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다큐멘트라 할 수 있다. 윌리엄스는 시골의 농민·노동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자라온 사회적 생태계에 바탕을 두고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근원적 공간 분할인 ‘시골과 도시’의 경험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술한다. 그의 다른 주저들이 이론적 분석과 역사적 성찰이 주조를 이루는 다소 건조한 인상을 준다면, <시골과 도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청년 시절의 민감한 관찰을 영국의 산업 자본주의화 과정에 대한 기술 속으로 녹여낸 촉촉한 느낌을 준다. 이 저서를 통해 윌리엄스는 시골이 어떻게 자본의 운동 속으로 포섭되는지를 민중들의 일상과 문화 해석에 착목하여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딱딱한 연구서라기보다는 포용적이면서도 예리한 하나의 지성이 스스로의 오감과 기억을 동원하여 구성한 영국 산업 자본주의의 역사를 담고 있는 셈이다.
여기까지 살펴본 <시골과 도시>는 얼핏 보기에 목가적 농촌 공동체를 살벌한 산업 자본이 파괴해온 역사라는 구도로 서술되었을 거라 해석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냉철한 눈은 결코 그런 단순한 대립구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스는 농촌에 산업 자본주의의 도시와 대비되는 목가적 공동체를 중첩시키는 낭만적 시각을 철저히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농촌 공동체가 언제나 이미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해 파괴될 위험 속에서 역동적으로 존속해왔음을 강조한다. 즉 이 공동체는 자족적으로 존속해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힘을 해석하고 변용하고 그것과 타협함으로써 스스로의 ‘전통’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윌리엄스가 말하는 ‘문화’이다. 문화는 결코 소수의 엘리트들이 향유하는 보수적인 교양이 아니라, 인민들이 온몸으로 세계와 자연에 맞서 스스로의 의미망을 구축해온 몸부림의 전통인 셈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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