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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가장 가까운 나라의 아주 낯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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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31 14:33 조회22,1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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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 언론과 학계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최근에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언론에 종종 등장하지만, 북한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배경 및 현재의 위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가난하고 예측불가능하고 비합리적인 체제라는 극히 천박한 북한상이 그려질 뿐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북한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소개하는 찰스 암스트롱 교수의 글 서두이다. 암스트롱은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부 교수이자 동 대학 한국학연구센터 소장으로서 우리말로도 번역된『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2006)의 저자이다. 손꼽히는 한반도문제 전문가라 할 만하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몇가지 오해

  이 짤막한 글의 출처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와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가 함께 엮은『북한을 읽는다』(이윤정 옮김, 녹두 2003)이다. 따라서 암스트롱이 글을 쓴 것은 최소한 10년 전일 텐데, 몇 글자 고치면 10일 전에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낯이 익다. 그만큼 북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미지는 변함없이 부정적이다.

  그런데 와다·다카사키 두 교수가『북한을 읽는다』를 엮게 된 배경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2002년 9월 당시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평양선언을 발표한 바 있었다. 김 위원장이 일본인 30명의 납치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데 대해 고이즈미 총리가 역사청산과 경제협력을 약속함으로써 북-일 국교정상화 전망을 밝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너무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납치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그에 따른 충격과 분노가 일본사회를 강타했던 것이다. 납치된 희생자 가족과 귀국한 생존자 5명을 둘러싸고 두 달 넘게 연일 비슷한 내용의 보도가 계속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본에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 언론공세가 이어져오던 터라, 납치사실의 확인은 반북여론을 더욱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일부 텔레비전에서는 김일성 사망 당시 통곡했던 주민들은 동원된 배우라느니 평양 지하에 서울을 모방한 위장도시가 있다느니 하는 황당무계한 내용을 방송하기도 했다.『북한을 읽는다』는 이렇게 들끓는 여론의 왜곡을 바로잡고 균형을 되찾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의 서론에서 와다 교수는 일본에서 횡행하는 반북 캠페인의 요지를 다음의 5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김일성은 가짜이며 소련군에 의해 집권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 김정일은 세습을 통해 권좌에 앉은 무능하고 비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다. 3) 북한은 김일성 부자를 절대시하는 개인숭배 국가이고 수용소로 유지되는 억압체제이며, 경제적으로는 파산상태여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4) 북한체제는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다. 5) 북한은 전쟁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반드시 남한을 침공할 것이다.

  사실 와다 교수는 이미『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이종석 옮김, 창비 1992) 『북조선』(서동만·남기정 옮김, 돌베개 2002) 같은 본격적인 저서를 통해 김일성의 항일활동과 북한 역사의 전개에 관해 심층적인 연구를 발표한 바 있었다. 따라서 이 저서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황색언론의 반북 캠페인이 대부분 악의적 날조거나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함을 알고 거기에 현혹될 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진지한 독서인구는 늘 소수인 반면, 다수는 흥미위주의 선동적 보도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와다 교수가 학자로서의 본업을 잠시 접고『북한을 읽는다』같은 대중적 해설서를 엮은 충정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북 캠페인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해 있나

  일반적으로 와다 교수는 진보적 성향의 학자·시민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서와 문필로 판단하건대 그는 특정한 성향에 치우치거나 경직된 이념을 앞세우는 사람이 결코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실 자체에 충실한 중립적인 학자이다. 앞에서 소개한 일본 내의 반북 캠페인 주장들을 검토할 때에도 그는 합리적 근거에 입각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주로 일본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설득력이 있다.

  1)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은 33세라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 그래서 군중들 사이에서는 가짜가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일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이 김일성 위조설의 출발인데, 이 ‘가짜 김일성’설은 한국과 일본에서 1990년대 초까지 되풀이 유포되었다. 하지만 와다 자신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북한의 신화와는 다르지만 실제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지휘관임에 틀림없다.

  2)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김정일은 바보가 아니며,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후계자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영화인 신상옥과 최은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북한의 후진성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정일 역시 장단점을 고루 지닌 사람으로서, 그런 대로 유능한 지도자이고 독재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북한 정치체제가 극도의 개인숭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점에서 북한체제는 전시(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천황중심 동원체제와 유사하다. 수용소의 존재 및 수용자의 비참한 상황도 사실일 것이다. 수용소는 사회주의 국가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스탈린시대의 소련을 감옥국가라고 부르지 않듯 북한을 수용소국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도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앞섰다. 물론 그 후에 경제가 곤경에 빠졌고, 특히 1990년대 중반 연속된 자연재해로 대기근이 엄습하여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말하는 고통만으로 북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니다.

  4) 1990년대 중반부터 머잖아 북한체제가 붕괴할 것이란 전망이 일각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전망이 실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북한정권이 추구해온 경제재건 노력이 성공할지 여부도 아직 미지수지만, 여하튼 북한정권이 여전히 국민을 장악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5) 김일성 사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는 내용의 소설이 많이 나왔다. 북한의 병력은 한·미연합군에 비해 심한 열세이며, 핵개발도 공격용이라기보다는 미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기 위한 카드일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전쟁은 미국의 제재와 관련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미국이 공격해올 것이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전멸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면 북한이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 이는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다.

  위의 설명 가운데 1)과 2)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이미 사망했으므로 더 이상 논란의 실효성을 잃어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 삼대세습이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북한체제의 본질 속에는 김일성-김정일 권력이 그대로 살아있으며, 나머지 항목들도 여전히 현재적인 쟁점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5)는 최근 남북 간에 벌어지고 있는 대치국면을 상기할 때 놀랄 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다시피 지난 2월 12일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이 있었고, 이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결의가 뒤따랐으며, 이어서 북한의 격한 반발과 남한의 양보 없는 대응이 이어져 결국 개성공단의 잠정적 폐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위기진행의 일면이고, 이 일면과 짝을 이루는 다른 일면의 진행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미 합동군사훈련이라는 이름의 북한에 대한 막강한 무력시위의 측면이다. 핵실험을 하든 군사훈련을 벌이든 남과 북은 자신들의 행위가 공격용 아닌 방어용이고 전쟁억지의 수단일 뿐이라고 약속한 듯이 주장한다. 하지만 억지력과 억지력이 부딪치면 곧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임을 잊을 수 없다.

  카리스마 권력의 예속성 지속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객관적 연구가 쉽지 않았고, 좀 덜했을지는 모른다. 미국이나 일본 학계도 냉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미·중 접근으로 이데올로기 지형에 변화가 발생하면서부터인데, 알려진 대로 1980년대 초에 출간된 와다 하루키나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들은 북한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의도적인 왜곡을 피하는 것만으로 학문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도대체 학문의 세계에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무수한 사실들의 취사선택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려 할 경우 일정한 가치판단의 개입을 막기 어렵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더욱이 북한처럼 내부적 접근이 원천적으로 제약되어 있는데다가 공개된 자료들의 신뢰성에도 의문이 가는 나라를 연구한다면 해석자의 자의는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북한연구가 종종 이론적 가설(假說)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서론을 앞세운 까닭은 실은 최근 간행된 권헌익(權憲益)·정병호(鄭炳浩) 공저의『극장국가 북한』(창비 2013)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저자들이 정치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닌 인류학자라는 것인데, 와다 교수의『북조선』을 비롯해서 고 서동만 교수의『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선인 2005)나 백학순 박사의『북한권력의 역사』(한울 2010) 같은 근년의 역저들이 대체로 통사적인 접근임에 비해 이 책이 구조적 분석에 가깝게 서술된 것은 그들의 인류학적 학문배경과 연관될 것이다. 아무튼 내가 아는 한에서 『극장국가 북한』은 북한연구의 방법론에서 독보적인 업적이다.

  당연한 노릇이지만,『극장국가 북한』의 저자들은 몇몇 선배학자들의 이론과 개념을 자신들의 분석도구로 차용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들이 북한 혁명정치의 작동원리를 해명하기 위해 먼저 활용한 개념적 전제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카리스마 권력이론이다. 베버는 정치권력의 유형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바, 그에게는 카리스마적 권력이 전통적 황제권력이나 현대적 관료제권력에 비해 기이할 것 없는 사회적·역사적 현상이었다. 즉, 카리스마 권력이 출현하게 되는 상황은 평범하지 않을지언정 그 본질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었다. 베버의 관점을 인용함으로써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북한 정치체제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다른 어떤 정치체제만큼이나 현대적인 것이며 또한 글로벌한 현대성과 접촉하면서 만들어진 산물”(p.10~11)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상 와다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베버가 보기에 카리스마 권력은 사회적 위기가 고조되는 이례적인 시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격변이 수습되고 나면 결국 전통적 권력으로 돌아가거나 합리적 관료구조의 형태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정치권력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불신을 ‘혁명적 카리스마의 관례화’(p.62)라고 불렀는데, 저자들은 이 관례화의 유일한 예외가 북한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북한 정치체제의 수수께끼는 특이한 개인숭배의 관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행의 지속성에서 비롯된다”(p.13)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저자들이 해명하고자 하는 이 책의 주제이고, 그런 점에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라는 부제가 책의 제목으로 더 적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북한사회의 ‘극장국가’ 개념에 관한 논란

  『극장국가 북한』의 저자들이 북한사회의 변화와 북한 정치체제의 작동방식 간의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해 받아들인 더 중요한 개념은 책의 제목에도 사용된 ‘극장국가’이다. 그런데 미국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 1926~2006)가 19세기 발리의 왕권행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극장국가 개념을 처음으로 북한의 경우에 적용한 학자는 다름아닌 와다 교수였다.

  그는 “왕은 정치적 행위자이자 기호 중의 기호이며 권력 중의 권력이었다. 왕을 창조하고 왕을 군주에서 우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왕의 의례였다”는 등 기어츠의 설명을 인용한 다음 극장국가 개념의 북한적용에 한계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어츠의『네가라: 19세기 발리의 극장국가』영어판은 1979년, 일역판은 1981년, 와다의『북조선』초판은 1998년에 간행되었고,『북조선』한국어판은 김정일의 선군정치 선언에 대한 와다의 해석을 보완하여 2002년 간행되었다.)

  김정일이 연출가이자 디자이너로 있는 북조선의 유격대국가는 바로 기어츠가 규정한 ‘극장국가’의 성격을 분명히 부분적으로는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리 섬의 전 근대적인 전통적 왕권은 ‘극장국가’로 존재할 수 있으나 현대세계에서의 국가는 ‘극장국가’로 유지될 수 없다. ‘극장국가’는 아무래도 정태적인 질서를 전제로 하고 있어 역동적인 변화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김정일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스스로 얽매이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북조선』p.156)

  그러나『극장국가 북한』의 저자들은 와다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정치에서의 카리스마 권력의 위치와 운명에 대한 관심이 기어츠로 하여금 발리의 전통적 정치형식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베버, 기어츠, 와다가 모두 관련된 정치이론적 문제로서의 극장국가 개념을 논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어떻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자들이 이 개념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이 저서의 핵심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연구의 맥락에서 긴요한 문제는 어떻게 국가의 강력한 ‘과시의 정치’(politics of display)를 전근대적인 봉건적 현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현대적인 정치적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이 극장국가의 공연에서 어떻게 임기응변과 혁신의 요소를 찾아낼 것인가다. 효성을 정치적 충성의 원리로 바꾸어낸 것은 북한이라는 현대적 극장국가의 한 구성요소이자, 동시에 김일성의 대체할 수 없는 개인화된 카리스마와 그것을 세습적인 카리스마 권력의 형태로 영속시켜야 할 필요성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과정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p.97)

  요컨대 김일성이라는 탁월한 개인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세습적 카리스마로 영속시키는 것이 북한 정치의 핵심적 과제였던바, 이 과제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극장국가적 장치들 즉 과시적 연극·의례·건축·기념물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70년대 '극장국가'의 탄생…경제적 상실감이 원인

  1970년대는 북한 경제성장의 활력이 둔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식량부족의 징후는 이미 1977년부터 나타났고, 국가배급체계도 불안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 간에 갈등이 노골화하고 반면에 미국과 중국의 접근이 현실화함으로써 국제정치의 지형에 근본적 변화가 일기 시작한 때였다. 그와 함께 남한경제는 고속성장에 돌입해 있었다. 북한으로서는 이 모든 사태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경제적 활력의 상실과는 대조적으로 1970년대 정치무대에서는 북한의 국가권력과 권위의 연극성과 화려한 과시가 체계적으로 증폭되었다. 북한은 이 시기에 김일성 개인숭배를 총력을 다해 추진했으며 그의 만주 빨치산 전설에 지극히 영광스런 권위를 부여했다. (…) 바로 이 시기에 북한이 극장국가로서 실질적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p.184)

  김정일은 1970년대 초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한 이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40년 동안 북한 정치문화의 독특한 연극화 및 이에 결부된 김일성혈통의 우상화 즉 극장정치를 이끈 인물이다. 실제로 김정일의 정치경력은 예술활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북한인민들에게 “정치지도자일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이자 예술이론가”로 간주되며, 그가 집필한「영화예술론」(1973)은 북한예술사에서 “사회주의 예술철학을 혁명화한 걸작”으로 여겨진다고 한다.(p.76)

  또한 그는 1971년 김일성의 60회 생일 기념행사 준비의 일환으로 피바다국립극단을 만들어「피바다」(1971) 「꽃 파는 처녀」(1972) 같은 대중적 혁명가극을 제작하였다. 가극「꽃 파는 처녀」는 곧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은 국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북한에서는 “혁명예술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p.77)는 찬사를 받았고, 심지어 근래에는 최초의 ‘한류’라는 평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혁명가극들이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전통의 재창조”(p.79)였다는 점이다. 즉, 1930년대 만주 빨치산투쟁 시의 김일성의 창작에 근거한 것 또는 당시의 고난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작품들의 제작은 북한체제가 자신들의 “도덕적·정치적 정체성을 일제강점과 그에 맞선 저항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데서 찾으려 한다”(p.86)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바로 와다 교수의 ‘유격대국가’론이 규정한 북한 정치체제의 기본성격에 대응되는 것이다. 그것은 북조선국가 창건 이후 20년 동안 전개된 권력투쟁에서 김일성과 만주파가 최종적 승리를 거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격대국가의 구조 안에서 만주시대의 역사와 신화는 과거의 것으로 치부될 수 없고, 현재의 살아있는 역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실제현실 속으로 자꾸 불러들여와야만” 하는 국가적 당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은 “유격대국가는 극장국가의 예술정치에 내용을 제공하고, 극장국가는 유격대국가의 전설과 통치권 패러다임에 형태를 제공한다”(p.86)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북한에서 유격대국가체제와 극장국가체제는 상호보완적인 구성물인 셈이다.

  '극장국가'의 출구는 어디인가

  앞에서 언급했던 1970년대부터의 여러 난관들은 1990년경을 고비로 심각한 위기로 증폭되어 북한을 덮쳤다. 주지하는 것처럼 1989년부터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었으며, 마침내 냉전의 종식이 현실로 되었다. 중국과 베트남도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대외개방에 나섰다. 북한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강요된 것이었다.

  이때 북한은 잠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은 남한과의 관계에서 중국-대만 경제교역 모델을 따름으로써 곤경을 넘어설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1991년 10월 김일성의 중국방문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방문기간 동안 그는 중국의 경제우선 사회주의 모델에 따른 북한의 발전계획에 관하여 중국의 덩 샤오핑 및 장 쩌민과 논의했다고 한다.”(p.241) 알다시피 이 계획은 좌절되었고, 그 와중에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이듬해부터 자연재해가 찾아왔고, 이에 따라 유례없는 대기근이 엄습했다. 이 일련의 사태가 북한역사에서 얼마나 침통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극장국가 북한』의 저자들은 이렇게 기술한다.

  1994년 이후의 북한은 그 이전의 북한과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북한 이 도덕적·정신적 일체성의 최고중심인 김일성을 그해 7월에 잃었고 그후 강력한 추모 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에는 또한 북한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총체적 위기이자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엄청난 인도적 재앙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다. 이 재앙은 바로 북한대기근으로, 근래 북한에서는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p.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거국적인 장례행사만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이러한 공적인 집단적 애도에 대기근의 희생자들에 대한 사적인 애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p.53) 1994년부터 1998년 사이에는 또한 눈부시게 호화로운 금수산기념궁전이 만들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거대한 조선로동당창건기념탑이 세워졌으며, 고조선·고구려·고려왕조의 시조들을 기리는 대규모 역사기념물이 건설되었다. 평양과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을 연결하는 전용 고속도로도 닦였다. 국가배급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극심한 기근상태에서 “주민들이 열성적으로 기념물 건립사업에 참여한 것은 아이러니다.”(p.54) 이와 때를 같이해서 등장한 정치적 구호가 ‘선군(先軍)’인데, 와다 교수가 1990년대 말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의 불가피한 이행”(『북조선』p.325)이라고 보았던 북한 정치체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극장국가의 설계자이자 건설자인 김정일이 사라진 이제 북한은 어디로 갈 것인가. 당연히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북한 바깥의 관찰자들로 하여금 ‘유격대국가’ ‘극장국가’ 또는 ‘가족국가’(이문웅) ‘신유교국가’(김성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게 했던 이 나라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저서의 마지막 대목을 결론삼아 옮겨 독자들의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자랑스러운 성취는 그러나 동시에 비극적 실패이기도 했다. 북한은 카리스마의 자연적 수명에 저항하여 영원한 권위를 성취하겠다는 각오로, 인위적이고 과장된 대중동원의 예술정치로 무장한 극장국가로 변모해가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쳐갔다. 이러면서 (…) 20세기 혁명국가로서의 근본목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카리스마 권력에 대한 숭배는 정치와 행정권력의 극심한 중앙집중을 가져왔고, 이는 사회주의혁명의 민주적 원리를 파괴했다.(『극장국가 북한』p.275)

  현재의 북조선은 전쟁 말기의 일본과 닮은 부분이 많다. 공장은 가동되지 않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에서 생필품이나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고 (…) 공습으로 초토가 되어서도 정부가 결정한다면 본토결전, 본토옥쇄라 해도 기꺼이 따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도자 천황을 믿는 길 외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천황이 전쟁종료를 선언하자 일본국민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천황을 비판하려는 생각도 없이 미군의 진주를 환영했으며 천황의 ‘인간선언’까지도 받아들였다.(『북조선』p.294~5)


염무웅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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