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 분단과 여성의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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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04 15:16 조회25,1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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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국가성평등지수는 전체적으로 소폭 상승했으나, 안전 부문에서는 크게 악화되었다고 여성가족부가 발표하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 특히 성폭력 피해의 급증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당사자의 성정체성과 무관하게 여성의 몸을 가진 존재들로 하여금 일상을 위협으로 느끼게 하는 여성 차별의 중요한 계기이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믿음을 일순간 무너뜨리는 여성혐오의 발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은 이 땅 대다수 여성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대선 기간 내내 여성대통령 후보의 여성성을 두고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여성의 시각은 큰 쟁점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유력 야당 후보는 ‘대한민국 남자’를 표방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많은 진보 인사들은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여성 전체를 비하하는 언사를 남발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여성의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이도 정치적 진보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과 여성의 삶을 연결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밤길 안전 같은 ‘사소한’ 문제와 분단과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문제들은 생각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즘 한국 언론에서도 지난해 12월 인도 델리에서 일어난 심야 버스 집단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사태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데, 인도의 경험은 분단과 성폭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한국의 언론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인도에서 일어난 잔인한 성폭행 사건을 보면서 가부장적이고 여성억압적인 인도의 전통 ‘문화’를 원인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과연 남의 나라 성폭력에 대해 여성의 지위를 입에 올릴 처지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성폭력의 원인을 문화나 남성의 욕망에서 찾는 것은 곤란하다.
실제로 인도의 현대사에 밝은 연구자들은 인도의 여성억압과 빈발하는 성폭력에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 과정에서 약 7만5000명의 여성이 납치되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에 의해 더럽혀진’ 이들 여성은 이후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양국 지도자들의 합의로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렇게 민족과 국가 앞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당연하게 지워지는 사회에서 국가가 내세우는 안전과 질서는 시민, 특히 여성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몸을 통해서 어떤 대의나 명분을 확인하거나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데 익숙한 사회에서 성폭력이 근절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처벌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경우 역시 진실이나 인권보다는 반공과 질서가 우선하는 분단 현실에서 여성 시민의 안전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사회 안전과 질서는 공적인 공간에서 파업이나 시위를 몰아내거나 온라인 공간에서 욕설이나 정부 비판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잊을 만하면 남북 대치 상황을 강조하는 정부 밑에서 여성들은 마음 놓고 밤길을 걸을 수도 없게 되었고, 학교 보낸 아이의 안녕마저 안심하지 못하게 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여성대통령의 탄생으로 여성의 삶이 갑자기 좋아질 리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의 밤길이 안전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을 극복하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안전을 걱정하는 이들도 더 많은 감시카메라(CCTV)를 달고 화학적 거세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통일, 자유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일 일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한겨레, 2013. 1. 3.)
이러한 상황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은 이 땅 대다수 여성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대선 기간 내내 여성대통령 후보의 여성성을 두고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여성의 시각은 큰 쟁점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심지어 유력 야당 후보는 ‘대한민국 남자’를 표방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많은 진보 인사들은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여성 전체를 비하하는 언사를 남발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이렇게 여성의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이도 정치적 진보를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과 여성의 삶을 연결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밤길 안전 같은 ‘사소한’ 문제와 분단과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문제들은 생각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즘 한국 언론에서도 지난해 12월 인도 델리에서 일어난 심야 버스 집단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사태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데, 인도의 경험은 분단과 성폭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한국의 언론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인도에서 일어난 잔인한 성폭행 사건을 보면서 가부장적이고 여성억압적인 인도의 전통 ‘문화’를 원인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과연 남의 나라 성폭력에 대해 여성의 지위를 입에 올릴 처지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성폭력의 원인을 문화나 남성의 욕망에서 찾는 것은 곤란하다.
실제로 인도의 현대사에 밝은 연구자들은 인도의 여성억압과 빈발하는 성폭력에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 과정에서 약 7만5000명의 여성이 납치되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에 의해 더럽혀진’ 이들 여성은 이후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양국 지도자들의 합의로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렇게 민족과 국가 앞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당연하게 지워지는 사회에서 국가가 내세우는 안전과 질서는 시민, 특히 여성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몸을 통해서 어떤 대의나 명분을 확인하거나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데 익숙한 사회에서 성폭력이 근절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처벌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경우 역시 진실이나 인권보다는 반공과 질서가 우선하는 분단 현실에서 여성 시민의 안전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사회 안전과 질서는 공적인 공간에서 파업이나 시위를 몰아내거나 온라인 공간에서 욕설이나 정부 비판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잊을 만하면 남북 대치 상황을 강조하는 정부 밑에서 여성들은 마음 놓고 밤길을 걸을 수도 없게 되었고, 학교 보낸 아이의 안녕마저 안심하지 못하게 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여성대통령의 탄생으로 여성의 삶이 갑자기 좋아질 리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의 밤길이 안전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을 극복하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안전을 걱정하는 이들도 더 많은 감시카메라(CCTV)를 달고 화학적 거세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통일, 자유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일 일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한겨레, 201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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