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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영성마저도 약한 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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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25 16:23 조회22,12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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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 이후 근 한 달간 거의 이틀에 한 번씩 대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댔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시인의 말은 (처음엔) 정말 옳은 듯했다. 억지로라도 흥겹고자 “못난 놈들”만 골라 만났다. 그런데 매번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절뚝이는 파장(罷場)”을 겪다보니 차츰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같이 마시던 “못난 놈들”이 그른 소리를 하면 짜증을 냈고, 옳은 소리를 하면 비아냥댔다. 흥겹게 시작한 술자리가 괴롭게 끝나기 일쑤였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르는 분노와 섭섭함이 자꾸 솟구쳤다.

그러던 중 새삼 ‘영성(靈性)의 힘’에 의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 생각이 든 것은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1주기 추모미사에서 강금실 전 장관의 추도사를 듣고 나서였다. 강 전 장관은 약자, 패배자, 피해자, 그리고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자라고 해서 상대를 마구 공격하고 상처를 줘도 괜찮은 건 전혀 아니라고 했다. 예수의 사랑은 강자, 승리자, 가해자, 그리고 악한 자마저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요컨대 영성에 기초한 초월적 사랑으로 분함과 억울함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감동이 왔다. 그러나 이틀도 못 가서 난 또 그 “못난 놈들”과 더불어 다투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시 차분해진 것은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서였다. 장발장의 평화로운 죽음과 자베르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교하며 역시 사랑과 영성이 승리한다고 믿기로 했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어찌 그 영성을 쉽사리 얻을 수 있겠는가. 강금실과 장발장의 영성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면 오랜 세월에 걸친 깊은 묵상과 처절한 연습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 문제인 나는 그 영성이 얻어지기 이전까지 과연 무엇으로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일단 두 가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나는 5년간의 금주였고, 다른 하나는 영성마저도 약한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 문제를 풀기 위한 ‘제도적 해법’ 마련에 더욱 매진하자는 것이었다. 전자는 순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나보다도 약한 내 이웃들을 위해 나름 무언가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결심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분노는 기본적으로 좌절감에서 온다. 보수주의자들은 흔히 자기 노력으로 원하는 바를 성취하라고 조언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정치 및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그 조언으로 인해 오히려 좌절감을 더욱 깊이 느낀다.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는 패자가 알리바이를 위해 꾸며낸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엄존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이 구조하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의 높은 쪽에 위치한 소수 기득권자들(과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세력)의 승리로 결정돼 있다. 낮은 쪽에 몰려 있는 약자들은 그저 좌절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여기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구조 바꾸기에 힘써야 한다. 특정 집단이 늘 승리하고 그 승리자가 거의 독식하는 한국의 현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좌절과 분노로 가득한 불안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영성이 강한 개인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들은 영성마저도 약하다. 그들이 충분한 영성을 갖추기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사이의 희생과 비용이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고쳐놔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히려 선천적 약자들이 더 높은 쪽에 자리할 수 있도록 운동장의 구조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약자들에게 희망이 생기고 영성 강화에 신경 쓸 여유도 주어진다.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강화, 경제의 민주화,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 비례대표제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 등이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될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인 까닭이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3. 1. 25.)

댓글목록

유희석님의 댓글

유희석 작성일

최태욱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진하게 공감하게 되는 글입니다. 건강,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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