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 당신의 선의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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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25 16:02 조회20,0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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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
장애는 그저 조금 불편한 것이라고, 작은 차이일 뿐이라며, 여기저기 장애 체험이라는 것을 한다. 경찰관도 학생도 눈을 가린 후 지팡이도 짚어보고 점자도 찍어보고 또 휠체어도 타 본다고 한다. 장애인들은 "일반인"들과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그 어려움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야 어찌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익숙한 시점을 버리고 다른 시점을 취해 보는 경험은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어느 박물관에서 본 흑인 노예 체험, 우리나라 어느 박물관에 설치된 달구지 타고 귀양 가는 압송 체험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체험 학습의 유행 속에서 요즘의 장애 체험 역시 무엇을 체험한다는 것인지 의구심이 가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장애란 무엇이고 몸으로 겪는다는 뜻의 체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말이다. 더구나 장애 체험 교육은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줌과 동시에 장애 발생 예방 교육도 겸한다니, 장애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신체적·정신적 조건임이 분명해 보인다.
노예 체험이든 장애 체험이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지점은 도대체 체험시켜 준다는 그 경험의 내용이다. 시끌시끌한 관광지에서 잠시 좁은 방이나 달구지에 갇히거나,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휠체어를 타보고 어두운 방에서 청각과 촉각에 의지하여 움직여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장애인의 경험이 아니라 불편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식의 "체험"을 한 후에 장애는 그저 조금 불편할 것일 뿐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 장애를 그저 조금 불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아직 갈 길이 멀 뿐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이 아무리 바뀐다고 해도 그저 조금 불편하다고 하기 어려운 장애도 있다.
▲ <거부당한 몸>(수전 웬델 지음, 김은정·강진영·황지성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장애 체험으로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일단 장애라는 상황이 잠시 선택해서 경험하다가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잠시 둘러보고 가는 관광객과 거기서 계속 살아야 하는 주민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애는 그저 다니는데 불편하거나 보이지 않아 불편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 된다. 평소 자신은 "장애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무관심과 무지 혹은 너무 빠른 이해와 공감이라는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장애인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든가,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라면서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차이조차 무시하곤 하는 것이다.
결국 인권의 시대에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이야기하고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장애인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차별 자체가 사라지기는 어렵다. 그럼 도대체 장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좋단 말인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면서 같다고 해도 곤란하다니, 어쩌라는 것이냐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거부당한 몸 :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수전 웬델 지음, 김은정·강진영·황지성 옮김, 그린비 펴냄)은 바로 그렇게, 장애의 문제를 아주 남의 문제도 아니지만 너무 쉽게 안다고도 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옮긴이들이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장애와 여성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합쳐 놓은 것이 아니다. "장애 여성의 시각, 여성주의 시각으로 바라본 장애와 질병,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사회에 대한 논의"이다. 저자인 수잔 웬델은 철학자이자 여성학자로 활발한 연구를 하던 중 어느 날 찾아온 근육통성 뇌척수염이라는 병으로 인해 장애를 경험하게 된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장애 경험을 새로이 눈 뜬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이라는 제목이 주는 무거운 느낌에 비해서 구체적이고, 또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따라갈 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노력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이 아니듯이, 장애인이라고 해서 경험이 같을 수 없으며,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또 장애의 종류에 따라 경험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쉼 없이 일깨우고자 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여성주의 시각으로 장애를 바라본다는 것은 건강한 몸을 가진 젊은 (백인, 이성애, 중산층 등) 남성의 시각을 상대화해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또한 성별이 사회적인 구성물인 동시에 남녀 차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듯이, 장애가 사회적인 구성이지만 어떤 종류의 신체적인 차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인식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장애가 없는 여성주의자들의 여성주의는 몸의 경험이나 체현이라는 개념에 늘 관심을 가져오기는 했어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몸이 주는 한계나 고통에 대해서 사유하거나 문화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측면이 얼마만큼 배제되어 왔는지를 반영하지 않는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한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일반화된 희생과 과로의 삶,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 역시 비장애인 중심적임을 집어내기도 한다.
장애라는 몸의 조건은 장애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매우 다양하고, 그 몸의 조건이 누구에게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삶은 몸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며, 몸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 삶에 조건에서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저자는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날 때부터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조건들을 가지게 되며, 살아가면서 병들거나 다치지 않더라도, 결국 나이 듦을 통해서라도, 애초부터 불완전했던 몸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고 몸의 기능을 상실해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무시된 채 자율적인 개인, 몸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는 존재를 표준으로 해서 구성된 사회적 공간, 여러 법과 제도, 사회적 상식과 통념, 그리고 심지어는 학문적 성찰을 모두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장애의 경험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존중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존중해야 할 성격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애를 가졌다고, 그것도 사회적으로 공인된 장애인들만의 것은 아니게 된다. 또한 장애는 사회적 낙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사회의 속도와 체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공식적인 이유를 제공해주고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장애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투쟁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장애란 인간 존재라는 철학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삶의 현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사실 책을 읽다 보니 저자도 저자지만, 옮긴이들의 마음이 먼저 읽혀 왔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야겠다. 장애라는 주제를 특수한 관심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또 서로에 대해 사회 일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인식을 보이곤 하는 장애와 여성, 그 두 개의 운동 사이에서 옮긴이들은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한 말이 많았을 것이다.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한 말도 많았을 것이다.
어떤 주제가 쉬울까만 사실 장애, 그것도 장애 여성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에 저항해야 하지만, 실제로 많은 장애가 불편과 통증이나 합병증을 수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장애에 대한 낙인을 거부하면서도 장애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 역시 구체적인 맥락을 떼어 놓고 보는 사람에게는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장애인들 스스로 장애를 의료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획기적인 의료 기술 발전에 대한 희망을 놓기 어렵다.
장애 가능성만으로도 낙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장애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고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을 권리는 멀게만 느껴진다. 미용을 목적으로 한 성형 수술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울 만큼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강박이 있는 나라에서 장애를 차이로 봐야 한다는 말은 쉽지 않다. 게다가 장애를 무슨 은유나 상징처럼 쓰는 경우도 많다 보니, 장애가 특정한 누구만의 일이 아니라는 말조차 장애에 대해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쉽게 일반화하는 논의를 부추길까 조심스러운 것이다.
어떤 이야기 하나를 하려면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전제들이 무수하게 있는 것 같고 내 힘으로 그 이야기를 다 풀어가기에는 힘에 부치는 막막한 느낌 속에서 옮긴이들은 이 책을 공들여 번역한 듯하다. 간혹 원래 저자가 사용한 영어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한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읽고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는 번역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옮긴이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이라고 앞서 말한 문제들에 대해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입장은 사실 상당히 복잡한 지형에 놓여 있다. 저자는 유엔(UN)이 정한 장애의 정의의 장점을 인정하지만 사회 문화적으로 지나치게 상대화하는데 따르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으며, 나이 듦에 따른 취약함과 장애를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너무 뚜렷하게 구분하다보면 인간다움의 전형이 젊고 건강한 것이라고 보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장애가 큰 틀에서 장애 없는 사람들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사회 때문에, 또 사회에 의해서 정의되는 문제라고 보면서도 장애의 문제가 단지 사회적 정의만의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만 집중하다 보면 몸 자체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고 배제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장애학과 여성주의 윤리학이 근본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고, 또 서로 함께 가야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보통 이렇게 복잡한 입장을 가진 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글 모두 부족하니 내가 제일이라는 깔때기의 냄새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수잔 웬델은 장애학과 여성주의 윤리학의 교집합을 추구하면서도 합집합의 영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해하는, 뺄셈이 아닌 덧셈의 정치를 보여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은 장애나 여성, 혹은 몸과 의료에 관심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 인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람, 사회 속에서 차별과 차이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 누구나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철학자라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어 조심스럽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섣부른 일반화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에 기반을 두지만, 성찰하고자 하며, 자신이 경험한 의료에 대해서도 그 사회적 맥락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유념하고 보면, 이 책이 쓰인 맥락과 한국의 현실 사이의 차이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측면은 가족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질병으로 인해서 장년기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던 저자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장애의 사회적 경험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지지와 돌봄을 제공해주는 존재로서든 아니면 차별과 억압을 가하는 존재로서든 가족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지만, 장애인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가족에 대한 연구가 아직은 덜 다뤄진 분야인 듯하다. 여전히 많은 논의는 개인 대 국가를 주된 축으로 하여 이루어지지만, 복지와 통치의 단위로서, 그리고 친밀함(혹은 그 결여)의 공간으로서 가족에 대한 연구는 장애, 특히 장애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논의를 딛고 우리 현실을 담은 좋은 연구와 실천들이 많이 기획되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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