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역사의 후퇴 앞에서 리샹란을 생각하다 [역사의 뒤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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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5-30 16:38 조회2,9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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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시절 배우(가수) 리샹란의 모습. 일본인이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활동했다.ⓒ자주시보 갈무리
지난 3월28일,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세상을 떠났다. 남긴 작품이 많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그에게 오스카 음악상을 안긴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1987)의 OST일 것이다. 영화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일제의 괴뢰 만주국 황제를 지낸 푸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중국 현대사의 격동과 푸이의 복잡한 내면이 만나고 뒤틀린다. 드라마틱하던 영화의 호흡은 푸이의 내면으로 초점을 옮기면서 차츰 유장해진다. 황제에서 민국의 국민으로, 다시 황제로, 죄수로, 이윽고 인민공화국의 평범한 공민으로 늙어가는 한 인물을 쫓는 카메라가 담담하다. 그리고 묻는다. 개인이 역사 속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은 어떤 것인가?
영화에 삽입된 음악 중 〈비, 나는 이혼을 원해요(Rain, I want a divorce)〉이 특히 인상적이다. 만주국 제2황후이던 숙비(원슈)가 황제 푸이에게 “나는 이혼을 원해요” 하고 외치며 음악이 시작된다. 황후는 밖으로 뛰쳐나와 비를 맞으며 여인이, 인간이 된다. 실제로 다른 남성을 만나 사랑하며 살았다. 당당한 여성상에 어울리는 강렬한 곡이다.
만주국 황실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푸이의 동생 푸제는 일본 귀족 사가 사네토 후작의 딸 히로를 부인으로 맞았다. 물론 강요였다. 푸이에게 아이가 없었으니 장차 만주국 황제에게는 일본의 피가 흐를 터. 황실의 경계는 당연했다. 푸이는 그녀가 일본의 간첩이라며 의심했다. 일본의 논픽션 소설 〈황제 푸이〉(1960)에서는 푸이가 의심을 푼 다음 미안한 마음에 우연을 가장해서 히로 부인이 봤던 영화 〈백란의 노래〉의 여주인공 리샹란(李香蘭)과 만나게 한다. 황제와 리샹란은 같은 피아니스트의 제자다. 젊은 ‘여배우’를 황궁으로 부르면 스캔들이니, ‘피아니스트’ 리샹란을 스승과 함께 초대한다. 황제의 배려로 리샹란과 푸제 부부가 만난다는 이야기다.
1987년에 펴낸 자서전 〈리코란, 나의 반생〉(국역 〈두 개의 이름으로〉, 소명, 2020)에서 리샹란은 이 에피소드가 픽션이라고 단언한다. 푸이를 만난 적이 없다며. 그렇다고 해서 인연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인연이 곡진하다. 황실 감시를 책임진 관동군 중장 요시오카 야스나오가 사이에 있다. 푸이와 히로 부인이 자서전에서 “악의 앞잡이”로 묘사한 인물이다. 촬영과 공연으로 동아시아를 떠돌던 리샹란은 수도 신징에 오면 요시오카의 집에 머물렀다. 그녀에게는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게다가 팬클럽 ‘리샹란을 지키는 모임’의 회장이기도 했다. 그의 부인, 딸과도 가족처럼 지냈다. 공적 세계에서의 악인이 사생활에서 따뜻한 사람인 경우는 흔하다. 종전 후 소련에 억류된 요시오카는 1947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다. 그나마 대가를 치른 경우랄까.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일제의 괴뢰 만주국 황제를 지낸 푸이.ⓒWikipedia대동아공영권의 기획된 스타 리샹란
무엇보다 리샹란은 만주국의 대표 스타였다. 중국과 조선, 일본, 타이완 등 동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쳤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5년 사이에 동아시아 최고의 여성 스타는 조선의 최승희와 만주국의 리샹란이었다. 그녀를 키운 건 일본제국주의였다. 푸이가 그랬던 것처럼.
리샹란은 1920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 인근에서 태어났다. 푸순과 펑톈에서 자랐고 베이징에서 여학교를 다녔다. 일본의 국책기업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세운 만주영화협회(만영)와 전속계약을 맺고 〈백란의 노래〉(1939), 〈지나의 밤〉(1940), 〈열사의 맹서〉(1940) 같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대륙 3부작’의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아름다운 중국 여성과 신사답고 용감한 일본 남성이 사랑에 빠진다. 여성의 가족, 친지들이 온갖 계략으로 괴롭힌다. 여성은 아파하고 때로 흔들리지만, 일본 남성은 굳은 신의로 사랑을 지킨다. 마침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이 이뤄진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시절이었다. 대동아공영권도 곡절 끝에 결국 성사되리라는 함축을 담았다.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중국의 명소들을 담으면서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 덕이다.
직접 부른 주제가들도 히트했다. 리샹란은 미성의 소프라노였다.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그대는 언제 돌아오나요)’ ‘야래향(夜來香)’ 같은 노래들이다. 타이완 가수 덩리쥔의 리메이크로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박영훈 감독의 영화 〈댄서의 순정〉(2005)에서 조선족 출신의 장채린(문근영 분)이 춤출 때 ‘야래향’이 나온다. ‘그댄 몰라요’라는 제목으로 문근영이 직접 불렀다.
리샹란은 조선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조선군 보도부가 만든 내선일체 선전영화 〈그대와 나〉(1941), 징병제 실시를 맞아 조선 젊은이들이 기꺼이 황군이 된다는 〈병정님〉(1944) 등에 출연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유명해지는 가수 이해연과 함께 엔카의 아버지 고가 마사오의 곡 ‘영춘화(迎春化)’(1943)를 취입하기도 했다. 〈조광〉 1940년 4월호에는 한복을 입은 ‘이향란(리샹란)’의 화보와 인터뷰가 실려 있다. 반도의 무희 최승희와 금강산에서 로케를 하고 싶다거나, 조선인 남성에게 구애를 받은 적이 있다는 등 조선과의 인연을 강조한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1941년 2월23일, 리샹란이 조선 순회공연을 위해 부산항에 들어왔을 때 일이다. 양산 사는 이인재라는 이가 친아버지라며 나타났다. 〈백란의 노래〉라는 영화를 봤는데 여주인공 이향란이 여덟 살 때 잃어버린 자기 딸 희득이를 빼닮았다는 것이다. “친아버지가 맞습니까?” 묻는 기자들에게 리샹란이 답한다. “정말 그런 분이 계신다면 만나보겠어요. 저는 어느 곳 태생인지, 부모가 누구인지 사실은 모릅니다. 산구(山口) 씨가 제 친부모같이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제 친부모는 아닙니다. (중략) 꼭 만나보겠어요.” 막상 이인재가 찾아오자 리샹란은 만남을 거부한다. 결국 만나지만 단호했다. 부인된 ‘아비’는 분노했다. “틀림없는 희득입니다. 그러나 당자가 자기 인기만 생각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우리도 천천히 선후책을 생각해보겠어요.”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 영화 〈대나무집〉(1955)에 출연한 리샹란(오른쪽).ⓒMUBI고향도, 친부모도 모른다는 것이 만영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어느 쪽이든 핏줄이 닿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타이완에서, 일본에서 친부모가 나타났다. 이 나라 저 민족의 복식을 하고 사진과 영화를 찍었다. 대동아공영권의 스타로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비로소 정체가 드러났다.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과연 산구 씨의 딸, 일본인이었다. 만철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익히고 아버지의 중국인 의형제 밑에서 양녀처럼 자랐다. 중국인 양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 리샹란이었다. 두 나라 말에 능통한 데다 노래도 잘하는 소녀가 있다는 말을 들은 만영에서 스카우트했다. 부모의 양해 아래 부모 없는 중국인 노릇을 하면서 스타가 됐다. 일본이 패하자 ‘한간’, 즉 매국노로 체포됐다.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니 당연했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데 일본인임을 증명하는 호적 서류가 도착했다. 한간의 죄는 정의상 중국인에게만 적용됐다. 일본인이 한간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추방됐다.
귀환한 일본에서 야마구치 요시코로 또 한 번의 삶을 살았다.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했고,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방송인으로 활동하다가 자민당 소속으로 18년간 참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미얀마, 남아공 흑인 등 약소국, 약소민족의 입장을 조명하며 평화주의자를 자임했다. 자서전에서 누차 밝히듯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했다. “그녀의 삶은 반성의 말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일본인 저술가 야마자키 도모코가 〈아시아 여성교류사 쇼와편〉(국역·〈경계에 선 여인들〉, 조선뉴스프레스, 2013)에서 내리는 평가다.
하지만 나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그녀의 이력 하나에 주목하고 싶다. 1953~1954년에 추진된 일본과 인도네시아의 합작영화 〈영광의 그늘에서〉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일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개입으로 영화는 무산됐다. 일본의 전후 배상이 없다는 게 문제가 됐다. 실은 줄거리 자체가 문제였다. 패전 후 귀환하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네덜란드와 싸운 일본군을 조명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출신도 있었다. 후일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서되는 양칠성 같은 인물이다. 어쩌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싸웠을까?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점령 중이던 1943년 10월, ‘조국의 수호자’를 뜻하는 페타(PEmbla Tanah Air)라는 현지인 의용군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산됐지만 페타 출신의 수하르토와 수디르만 등이 군대 조직을 주도하며 인도네시아 군의 전신이 됐다. 옛 상관이던 일본군 일부가 종전을 거부하며 함께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실상은 어땠을까? 인도네시아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에카 쿠르니아완의 소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에 그 상처들이 생생하다. 주인공 데위 아유는 네덜란드인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여성이다. 다른 네덜란드 여성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혀 일본군 하급장교를 위한 위안부가 된다. 강간으로 태어나는 그녀의 딸들은 모두 창녀가 된다. 그래도 파괴되지 않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나간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17일자로 독립을 선언했다. 페타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일본군에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깃발이나 처먹어라. 그리고 붉고 흰 인도네시아 국가를 엄숙하게 게양하고 국가를 불렀다.”
야마구치 요시코(리샹란)는 일본 귀환 후 18년간 자민당 소속 참의원을 지냈다.ⓒ연합뉴스1995년의 야마구치와 2023년의 윤석열
네덜란드를 쫓아냈다고 일제가 해방자일 리 없었다. 어차피 침략자였고, 그래서 쫓겨났다. 일부가 같이했다 한들 역사를 뒤집을 수는 없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선택은 미심쩍었다. 영화 제작을 포기한 이들이 대신 촬영한 영화가 일본 영화계 전설의 시작, 〈고지라〉였다.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직후였다. 수폭 괴수가 열도를 파괴한다는 줄거리는 일본이야말로 피해자라는 서사의 시작이 됐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992년 정계 은퇴 후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1995년,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피해 보상의 방안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기금)’을 발기하고 부이사장이 됐다. 16명 발기인 중에는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교수처럼 대표적인 진보·리버럴 인사도 포함됐다. 일본 정부가 사죄하되 배상은 시민사회가 국민 모금으로 맡는다는 방안이 큰 논란이 됐다. 왜 이런 방식일까? 일본인은 군국주의 시절은 물론 패전 이후에도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다. 시민사회 주도 배상이야말로 일본인이 주체적으로 자기 책임을 인정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확고히 묻던 진보 진영이 분열하는 계기가 됐다. 1995년, 기금의 발기인들이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이다.
“이 전쟁은 일본 국민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께도 크나큰 참화를 초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10대 소녀까지도 포함된 많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들고 그들에게 종군을 강요한 것은 여성의 근원적인 존엄성을 짓밟는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여성 여러분들의 심신에 가해진 깊은 상처는 우리들이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저희들은 ‘위안부’ 제도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와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역사의 사실 해명에 전력을 쏟으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죄를 하도록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겠습니다.”
국가의 책임을 직시하지 않는 편법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거부되고 일본 진보 진영에서 비판받았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조선인 위안부와의 짧은 인연을 계기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전한다. 국문학자 고 김윤식 교수는 “특등석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꼬집었다. 사죄하는 주체의 위치가, 시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역사 속에서 개인이 책임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고민하게 된다.
2014년, 아베 정부는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었다며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호소문을 삭제했다. 2023년 4월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은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역사적 책임에 대한 오랜 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말 속에서 증발했다.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어질 수 없는 상처”라는 최소한의 인식마저 사라졌다. 아베를 향해 사죄를 촉구하던 사카모토 류이치도 떠났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 같은 거친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이번에는 쓴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조형근 사회학자
시사인 2023년 5월 14일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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