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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배우지 않는 어른 사회와 학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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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8-02 12:25 조회3,1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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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고 한다. 기록적인 폭우와 더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일어난 죽음들은 단지 가슴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각기 정황이나 원인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의 목숨보다 앞선 자리에 놓인 가치들이 많음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고든, 행정에서 반복되는 과실이나 태만이든, 그것들이 반복되는 정황마저도 낯익다는 사실이 주는 무력감은 가뜩이나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한다. 

학교 현장 역시 답이 어려워 보이기로는 그 어떤 문제에도 뒤지지 않는다. 지난 18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세상을 떠난 후 교권과 학생 인권, 학부모 갑질에 대한 논란이 뜨겁지만, 교육 현장의 문제가 그뿐만은 아니다. 학교가 위치한 지역이나, 교사와 학생의 나이와 성별, 계층에 따라 학교에서 하게 되는 경험은 매우 다르기도 할 것이다. 이상한 학부모와 다루기 어려운 학생들이 많은 만큼, 교사의 비리나 일탈도 현실이다. 학생인권조례 탓을 하는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현재 학교는 교사의 인권도, 학생의 인권도 모두 지켜지지 않는 공간에 가깝다. 

올해 초 개봉된 영화 <다음 소희>는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으로 콜센터에 보내져 누구도 맡기 꺼리는 업무를 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등학생의 사건을 다뤘다. 열악한 노동조건이 꽤 알려진 콜센터 자체보다도 더 큰 문제로 보였던 건 학교와 교육청이었다. 학교는 평가실적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다”고 호소하는 학생을 몰아붙여 일터로 억지로 돌려보낸다. 교육청은 그 상황을 알고 있지만 감독할 인력이 없다며 책임을 상부로 미룬다. 실제 그 영화에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역을 맡은 배두나로부터 유일하게 얻어맞은 사람은 죽은 학생 탓을 하던 교감이었다. 

교육 문제에 대한 대응 가운데 가장 흔한 방식은 한국의 교육 문제에는 입시 제도나 서열화, 능력주의 등 당장 해결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다고 하면서 해결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육 과정을 통과하는 일이 고통스러워 학부모도 학생도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그렇게 지나가고 나면 바로 잊고 싶어 하는 게 지금의 학교이다. 교육에서 이런 개인적 생존주의의 횡행은 그동안 제시되었던 교육 대책들이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해 지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건이나 사고보다 무서운 게 방지 대책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책임질 수 없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거나 증빙서류 늘리는 것으로 해결을 대신하는 사태가 반복된다. 

물론 이른바 ‘재발 방지대책’이 문제가 일어나는 현장 자체를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행정절차만 복잡하게 만들어 업무를 돌볼 시간은 더욱 줄어들게 만드는 악순환의 상황이 교육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교육을 단지 지식의 전달이나 평가를 통한 줄세우기로 보는 게 아니라, 무엇이 인간다움인지를 묻고 서로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지를 탐색하며 그 배움을 실천하는 장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관료적 해법은 교육 현장에서 특히 문제가 된다. 

사실 교육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건 어쩌면 많은 사람이 학교를 인간적 배움의 장소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시 전인교육을 꿈꾸기도 하는 초등교육의 시기를 지나고 나면 사회가 학교에 주문하는 요구사항은 거의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산업적 요구에 부응하는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된다. 공교육은 거대한 교육시장 속 톱니바퀴의 일부가 된 지 오래고, 대학은 기업 일부가 될 것을 요청받고 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시기가 늦고 학교를 오래 다니는 나라에서 성인이 된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별과 모욕, 불평등이 존재하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기관이 돼 버린 학교를 일단 졸업한 어른들은 스스로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사람이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학교를 떠나면서 스스로 이젠 더 배우지 않아도 돼 기쁘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학교가 종종 죽음의 공간이 되는 건 놀랍지 않다. 

지금 문제는 지나치게 커져 버린 학생 인권을 우려하거나 학교 현장에 더 많은 규제와 관리를 도입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세정(世情)도 더는 배우지 않으면서, 각자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갑질을 하며 민원인의 태도로 살아가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배우고, 약게 사는 거라 여기는 어른들을 문제로 겨냥하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세교연구소 소장

경향신문 2023년 7월 25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72503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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