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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그래도 초록을 꿈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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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2-24 15:33 조회22,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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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없이도 경제성장은 가능하다. 치안유지와 좁은 의미의 평화도 가능하다. 전두환과 박정희의 독재 치하에서도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밤거리는 안전했다. 그러나 녹색으로 상징되는 가치가 결실을 맺는 세상은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녹색 세상은 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한껏 펼쳐질 수 있을 때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은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기득권 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불온해 보일 수 있다. 자전거 ‘대로질주단’이 광화문 앞 세종로의 차선 하나를 온통 차지하며 달려가고, 도시텃밭 ‘게릴라단’이 서울 곳곳의 방치된 땅에서 텃밭을 일구고, 조합원들이 평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는 협동조합들이 여기저기에서 솟아나고,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공동소유·공동분배 원칙에 따라 태양광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마음이 민주주의를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회혼란을 조장하고 공산주의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온한’ 행동들이 즉각 거부당하지 않고 다양해지고 퍼져나가야만 우리 사회는 녹색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지난 5년간 우리는 ‘불온한’ 상상력과 행동들이 매도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또는 오직 민주주의의 회복만을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느라 이런 ‘불온유쾌한’ 행동을 꿈꿀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며 정권교체가 되기만을 기원했고, 반민주 세력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서 위로를 받고 기운을 얻었다. 녹색의 가치는 반민주 세력은 물론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회복을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시 사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녹색 세상을 꿈꾸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 상당수는 정치권에 뛰어들어서 소위 정치인이 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민주주의 회복의 소원은 멀어졌다. 유세기간에 드러났듯이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앞으로 5년간 지난 5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울분에 차서, 팟캐스트 방송에서 위안을 받으며 다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만을 품에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다른 생각, 특히 녹색 세상을 향한 꿈은 전보다 훨씬 더 큰 사치가 되고 말았다. 민주주의에서도 퇴행이지만 녹색 가치에서는 더욱 큰 퇴행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또 한번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대의제 정치 안에서 새로운 국민정당을 만들고 그 성공에 매달리기만 하는 것은 과거 속에 머무르는 것과 다름없다.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아주 제한된 공간 안에서나마 녹색 세상을 위한 행동을 모색하고 확대해가야 한다. 사실 녹색의 가치를 확장하는 일은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개개인의 몫으로 남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많은 돈을 투자하거나 지원금을 늘린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지원금은 오히려 기발한 혁신적 생각과 행동을 망쳐놓는 작용을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자신이 그 가치를 깊숙이 받아들이고, 자기 생활 속에서 그것을 유쾌하게 실천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좁은 지역 차원에서 흥미로운 녹색의 사업들을 벌일 때 녹색의 가치는 서서히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서도 녹색 세상을 향한 작은 실천들은 가능하다. 5년 후를 내다보는 준비도 가능하다. 거의 모든 사람의 관심이 박정희 시대적인 돈벌이나 민주주의 회복에 쏠려 있어서 녹색 가치의 확장은 거의 기대할 수 없기에 신명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자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다시 지난 5년처럼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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