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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젊은 김대중, 말년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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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25 16:27 조회21,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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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1973년) 일기장에 쓴 장래 꿈은 지구 뒤쪽을 탐험하는 탐험가였다. 지구 뒤쪽이라니? 당시 나는 빙빙 돌아가는 구형 지구본을 본 적이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세계지도는 많이 보았지만, 그것은 둥근 지구의 보이는 반쪽만 펼쳐놓은 줄 알았다. 착각을 일으킨 요인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의 뒤쪽에 착륙한다는 얘기도 그중 하나다. 일기 검사를 한 담임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뭐라 지적했지만 이해하진 못했다. 한번 굳어진 사고체계는 금방 바뀌지 않았다. 구형 지구본을 한번만 봤으면 달랐을 테지만….
어릴 때의 착각이 생각나는 까닭은, 박근혜 당선인과 문재인 후보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의 머릿속에 각인된 기업, 시장, 노동관과 정치, 역사관 등에 큰 맹점이 느껴져서다. 사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 지식이 많아도 종종 대전제의 오류는 있는 법!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 문 후보가 사실상 합의를 본 공약이 적지 않다. 예컨대 공공부문이 솔선수범해서 비정규직을 해소하고, 정년을 연장하고, 정리해고의 요건을 강화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이 전제로 삼은 현실은 어떤 것일까? 기업의 과도한 탐욕(인건비 절감에 기초한 단기 이윤 극대화) 혹은 신자유주의 사조가 비정규직과 조기 퇴직 사태를 초래했다고 보는 듯하다. 법적 요건이 허술해서 정리해고가 남발되었다고 보고, 이를 강화하면 한진중공업·쌍용자동차 분규를 막을 수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지구 뒤쪽 탐험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이다. 상식적으로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대체로 경기를 타지 않는 독점사업이고, 상시·지속적이라고 믿는 직무 자체를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기술발전이라는 괴물을 걱정할 이유도 없고, 유사시 세금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으니! 물론 공공부문 정규직이 유럽처럼 전혀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공부문 정규직은 고졸을 전제로 직무가 설계된 9급 자리 하나를 놓고 대졸자들이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 한국의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는 많은 이윤을 내면서도 짜게 구는 악덕 기업주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앙상하고 비실비실하고 불안한 기업(자본)의 문제다. 그런데 해결이 쉽지 않다. 민간(중소)기업의 경영, 기술, 자금 능력 부족과 불공정 하도급 거래, 중국의 거센 도전, 시장의 변덕 등이 예사 문제인가? 요컨대 박, 문 두 후보가 합의한 공공부문의 솔선수범론도, 정리해고 요건 강화론도 민간(중소)기업의 현실을 너무나 도외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한 바탕 위에서 진정으로 솔선수범을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대(자조)와 공평과 합리적 고통분담이다. 기존 인건비 총액 안에서 노동시간 단축(연장근로 최소화) 등으로 고용을 최대한 늘리고,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고, 직무직능급제를 실시하고, 노동의 양과 질이 같다면 임시·계약직의 처우를 더 높이고, 파트타임 노동을 좀더 매력있게 만드는 등으로! 이런 정책 기조가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보수·진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치와 정책의 대전제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1950~60년대의 젊은 김대중은 당시 진보(좌익)와 보수의 주류적 통념과 관행에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유연한 진보를 화두로 삼던 말년의 노무현도 그랬다. 그런데 시대적 전환기의 징후가 역력한 지금 거시적 통찰과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지적 풍토는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진보의 가장 결정적인 패인인지 모른다. 젊은 김대중과 말년 노무현의 안목이 아쉽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한겨레, 201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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