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누가 통합을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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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28 15:28 조회21,7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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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며칠 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80만명의 미국 시민들 앞에서 취임연설을 했고, 박근혜 당선인은 취임식을 준비 중이다. 두 나라 모두 집권세력이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 물론 전자는 재선에 성공한 데 비해 후자는 현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며 당선된 점이 다르긴 하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두 사람 다 선거과정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국민통합이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국민들을 통합해내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통합이라는 말만큼 의미를 확정짓기 어려운 것도 드물 법하다. 다같은 국민이라도 서로 차이도 있고 차별도 존재한다. 적대관계가 있고 때로는 사활을 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평등과 부정의의 현실을 호도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통합이라는 아름다운 얼굴의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통합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국민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부조리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떠올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올비는 그릇된 환상의 허울을 벗어버린 살아 있는 삶의 맨얼굴이 주는 두려움을 그려내고자 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이 환상 없는 현실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누가 두려워하랴’라고 외치지만 이 큰소리에 오히려 두려움이 실려 있는 셈이다. 만약 통합이라는 허상 너머에 현실의 불평등구조가 야기하는 처절한 대립과 폭력의 현장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그 통합이 무엇을 위한 통합인지 되짚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들이 통합을 소리 높여 외치던 선거 중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철탑에서 죽음을 무릅쓴 농성을 벌여왔고 지금도 그렇다.
사실 오바마가 취임연설에서 내세운 국민통합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와 국민의 평등권 강조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의 통합 주장은 결국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평도 나온다. 한편 박근혜의 통합 논리 근저에는 기득권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보다 서서히 개선해 나가겠다는 보수주의가 깔려 있다. 같은 통합을 말하고 있지만 진보적인 미국 정권과 보수적인 한국 정권 사이에 그 역점의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통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을 빈부격차와 양극화로 보는 것은 미국과 한국이 마찬가지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산층 복원을 이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제시한 것과 유사하게 박근혜 당선인도 중산층 70% 시대를 약속한 바 있다. 특히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가 여야를 막론하고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도 양극화를 완화하지 않고는 사회통합이 불가능하고 국가의 활력도 살려낼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명목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통합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것이 배제된 통합이라면 다수 국민에 대한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 최근 여야가 특히 복지부문의 공통공약을 함께 실천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그런 지향의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
올비의 작품 제목에 나타난 두려움의 대상은 원래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라 ‘빅 배드 울프’(나쁜 큰 늑대)였다. 잘 알려진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가 그 배경인데, 허술하게 집을 지은 돼지 두 마리를 집어삼킨 늑대는 셋째 돼지마저 잡아먹으려 하나 셋째가 튼튼한 집을 지어둔 터라 실패하고 만다. 국민통합이라는 어렵고도 두려운 과업은 마치 우리 앞에 나타난 늑대와 같다. 그 늑대는 우리를 시험한다. 양극화 현실을 그냥 둔 채 얼버무리며 말만의 통합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부의 편중을 막는 단호한 조치를 통해 국민이라는 틀을 튼튼히 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누가 통합을 두려워하랴! 새 정부가 가짜 국민통합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선거과정에서도 확인된 경제민주화의 민의를 받들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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