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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토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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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2-05 13:05 조회21,5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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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선거의 민주성은 투표 자체보다도 선거 과정의 정치적 논쟁이 어떤 성격의 것이냐에 달린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다수결주의는 단지 어떤 의견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고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의견의 분포를 해석하는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형성되어 가는 차원에 있다. 즉, 정치토론의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워킨은 “정치논쟁의 부재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선 풍경은 어떤가. 주요 후보들이 추운 날씨에 매일 전국을 강행군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딱하거니와, 민주주의의 핵심을 실현하는 과정이라 보기도 어렵다. 물론 유세를 통해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과거의 신익희(1956), 김대중(1971)처럼 수십만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것이 때로는 국민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유세장에 모이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더구나 후보들의 활동과 발언은 신문과 방송의 의도적 ‘편집’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언론 환경에서는 객관성·공정성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박근혜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거론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가 코드인사라고 주장하고, 실패의 중요한 책임이 문재인에게 있다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가 이명박 정권의 안주인 노릇을 했던 만큼 박근혜의 당선은 이명박 정권의 연장일 뿐이라고 맞받았다. 문재인은 처음부터 참여정부의 일부 잘못을 시인하고 자신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겠노라고 역설했고, 박근혜는 뒤늦게 이명박 정권의 민생 실패를 인정하면서 자신은 서민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공방에 동원된 명제들은 많은 정치적 쟁점들을 함축하고 있어서, 언표된 주장만으로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판명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유세장 같은 데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중을 향한 감성적 선동일지언정 합리적 설명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부자감세와 재벌특혜를 국회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 박근혜였는데, 그땐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새삼 서민경제를 말하는 것은 생각이 바뀐 것인가, 서민들 표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런 점을 따지고 들어 해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다름 아닌 토론이다. 생산적 토론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현인 것이다.

다시 쟁점으로 돌아가 보자. 노무현·이명박 정권은 어떤 면에서 얼마나 실패했는가. 그리고 문재인과 박근혜는 그 실패에 각각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 인사 문제에 있어, 노무현 정부는 과거 보수언론으로부터 ‘코드인사’라는 욕을 먹었고 이명박 정부는 ‘정실인사’ ‘회전문인사’라는 비난을 들었는데, 그 비판은 얼마나 실제에 부합하는가. 무엇보다도 박근혜와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실천하겠다고 내놓는 약속들은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가. 혹시 5년 전 이명박의 747(7% 성장, 4만달러 소득, 7대 경제대국) 공약처럼 일시적 속임수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쟁점들이 짧은 문답으로 온전히 밝혀질 수는 없다. 지난번 문재인·안철수의 후보 단일화 토론도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지 못해 불만이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어진 박근혜 토론 프로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정책에 관해 교습받은 내용을 암송한 면접시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부실함과 불공정을 극복하고 후보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려면 그들이 충분히 말하고 자유롭게 반박할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매체, 즉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어야 한다. 드워킨의 말처럼 정치토론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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