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오키나와에서 본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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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08 15:34 조회21,7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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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경계에 붙어 있는 미술관이 하나 있다. 미군기지에 토지 제공을 거부한 ‘반전지주’ 사키마 미치오 씨가 만든 사키마미술관이다. 이곳의 주 전시물은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전의 참상을 그린 연작그림이다. 일본인 부부 화가가 공동작업한 이 연작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될 정도로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이 연작 중 하나에는 일본군한테 살해당한 조선인의 실화도 담겨 있다. 징용으로 끌려가 오키나와 여성과 가정을 이뤄 살던 이 남성을 일본군이 미군의 첩자라며 가족들 앞에서 살해하는 장면이다. 총검을 찌른 일본군과 주검이 된 조선인, 그 위에서 울부짖는 어린 아들, 실신한 아내와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해 눈을 가린 가족들…. 지난달 말 오키나와 방문에서 처음 접한 작품 속 장면이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학계는 징용이나 군대위안부로 끌려가 당시 오키나와에서 이렇게 비극적 최후를 맞은 조선(한국)인이 1만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오키나와평화기원공원 안에 세워진 오키나와전 희생자 위령비에는 300명 남짓만 이름이 올라 있다. 주검 발굴이 다 안 된 탓이 크지만, 주검이 확인돼도 가족들이 이름을 남기는 게 치욕이라며 기록을 거부한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이런 슬픈 역사가 배어 있는 오키나와와 한반도의 현대사는 꽤나 닮은 꼴이다. 일본에 강점당하고 태평양전쟁에 동원돼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을 대신해 여전히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키나와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강제병합됐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에서 홀로 대규모 지상전을 겪었고, 일본군이 본토 방위를 위한 시간을 벌려고 주민들에게까지 옥쇄를 강요하는 통에 민간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전 후엔 일본 본토를 대신해 1972년까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고, 일본에 반환된 뒤엔 본토의 미군기지까지 떠안아 전체 주일미군기지의 74%가 일본 면적의 0.6%인 오키나와 땅에 배치됐다.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대 명예교수는 미-일 관계의 모순을 오키나와에 떠넘기는 이런 방식을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구조적 차별’이라고 이름붙인다. 우리도 일제 강점과 태평양전쟁에 동원되는 희생을 치렀다.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이 분단이란 대가를 치른 것과 달리, 아시아에서 분단은 패전국 일본 대신 피해자였던 우리 몫이 됐다. 이후 분단은 60년 넘게 민족의 삶의 근저를 흔드는 근본적인 불안요소로 자리잡았다.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나 한반도의 분단은 일본을 하위동맹자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비상한 노력 없이는 극복이 힘들다. 올해 들어 오키나와는 비상한 노력을 본격화했다. 지난달 말 오키나와현 내 모든 자치단체가 일치단결해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과 신형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 배치 철회를 요구함으로써 더 이상 구조적 차별을 용인하지 않을 뜻을 천명한 것이다.
반면 한반도는 어떠한가? 북한은 주민의 삶이야 어찌됐든 체제 유지가 급하다며 로켓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위협하고 있다. 남쪽은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고 북을 고립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이를 기화로 일본 우파정부는 군비증강에 열 올리고, 중국은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해주는 대가로 센카쿠(댜오위다오) 갈등에 대한 미국의 중립 약속을 얻어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남북 대결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는 꼴이다.
새로 들어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남북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도역량을 높여가야 한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전 대통령은 회고록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에서 냉전시대 열강은 동서독 분단을 해결할 과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로 여겼지만, 독일인들이 “공동체적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남과 북도 공동체적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아야 열강의 이해관계를 뚫고 하나가 되는 길을 열 수 있다. 벼랑에 몰린 북한에 먼저 손을 내밀어 박 당선인이 추구하는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하는 일, 그것이 그 시작점이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3.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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