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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명저 새로 읽기]테오도르 헤르츨 <유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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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08 16:00 조회21,8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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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막가파’ 변신 이전의 정치적 시오니즘


“나그네가 우리처럼 집같이 느끼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애초에는 이렇게 될 터였고, 되어야만 했다. 정치적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그는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공동체이며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온협회(Zionsverein)’ 주도로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이 회의에서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해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고향을 만든다”는 결의를 한다. 그리고 헤르츨은 1902년 출간한 소설 <오래된 새로운 땅(Altneuland)>에서 이 유대인을 위한 고향이 “나그네가 집같이 느끼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에 앞서 1896년에 출간된 <유대국가(Der Judenstaat)>(도서출판b)는 이런 헤르츨의 구상이 상세하게 피력된 정치적 시오니즘의 선언서와 같은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186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으로 저널리즘에 종사하면서 19세기 중반의 국제주의-교양주의의 분위기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르주아 문화는 유대인에게 비교적 관대했고, 이른바 동화 유대인들이 금융, 법률, 의료, 언론 등 전문 업계에 진출하여 중산층 생활을 영위하는 비율이 높아졌던 시기였다. 프로이트를 위시하여 독일어로 작업한 수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사유를 가다듬은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젊은 시절의 빈을 회상하며 곳곳에서 밝히고 있듯이 반유대주의는 노골적이지 않았을 뿐이지 뿌리 깊게 존속하고 있었다. 이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잔존이 정치적 스캔들로서 표면화된 것이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헤르츨의 정치적 시오니즘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추동된 것으로, 유대인만의 국가 건설이 아니고서는 결코 반유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단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집필된 정치적 시오니즘의 선언서가 <유대국가>이다. 이 책에서 헤르츨은 유대민족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이나 아르헨티나에 건설할 것을 구상하면서, 그 준비를 위해 유대인 회사와 유대인 협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유대인 회사란 국가 건설을 위한 기금을 모집하고 운용하는 조직이며, 유대인 협회는 국가 건설을 위한 제반 정치-법률-문화적 사안들을 총괄하는 ‘국가 준비 기구’이다. 실제의 역사과정에서는 보불전쟁을 전후하여 동유럽에 무리한 투자를 함으로써 프랑스 경제에 금융공황을 일으킨 로스차일드 가문이 사실상 유대인 회사 건립을 주도하게 된다. 애당초 로스차일드 가문은 헤르츨의 구상에 회의적이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의 추이 등을 보면서 유대민족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의 배경에 공황의 원흉으로 지목된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비난이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헤르츨 자신은 1904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지만, 헤르츨의 국가 건설 구상은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으로 결실을 맺었고, 그는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되기에 이른다. <유대국가>가 이 모든 과정의 기원을 형성한 정치적 시오니즘의 선언서인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국가>는 유대인의 전투적인 배타성과 아랍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찬 저서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다. 현재의 이스라엘이 어떤 만행을 저질러 왔는지는 만인이 주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유대국가>를 읽어보면 애초에 정치적 시오니즘의 구상은 ‘사회민주주의’와 ‘국제주의’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반유럽, 반아랍의 주장은 찾아볼 수 없고, 새로이 건설된 이스라엘 국가가 1일 7시간 노동을 보장하는 급진적 사민주의를 국시로 삼음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가 집같이 느끼는 곳”이란 헤르츨의 이상은 이런 사유로부터 도출된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서 어긋났을까? <유대국가>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반드시 손에 들어야 할 책이다. 그것은 현재의 ‘깡패국가’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한, 나아가 20세기의 ‘혁명, 전쟁,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출발점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아렌트가 주장하듯이 유대인 문제가 20세기 정치 잔혹사를 이해하기 위한 특권적 장이라면,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에서 막가파로 변신한 정치적 시오니즘의 역사적 궤적은 작금의 글로벌 세계의 구축 과정에서 무엇이 은폐됐고 망각되었는지를 성찰케 해주는 사유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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