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이웃 간 분쟁 키우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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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18 12:52 조회21,3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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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독일 대학에서 조교로 일할 때 국가는 얼마 되지도 않는 내 월급의 40% 정도를 가져갔다. 그중 절반은 세금, 나머지 절반은 연금, 실업보험, 의료보험이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크게 불만을 가져보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대학 다니는 동안 등록금도 한푼 내지 않았고 의료보험이나 교통비도 아주 적게 내는 등 혜택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 취직한 후 내가 내는 세금은 월급의 10%가 채 안된다. 독일에서 일할 때와 비교하면 아주 적게 내는 것이지만, 그래도 불만은 꽤 있다. 혜택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세금을 투입해 만든 사회기반시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피부로 느낀 혜택이라고 해야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서 매 학기 공짜로 교과서를 받아온 것 정도밖에 없다.
세금과는 관계없지만 국가정책 중에서 내가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느낄 만큼 큰 혜택을 준 것은 아마 그린벨트 제도일 것이다. 이 제도 덕분에 내가 사는 동네가 아파트나 다가구가 빼곡한 곳으로 개발되지 않고 살기 좋은 ‘도심 속 전원’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발의 열풍이 시들해지면서 우리 동네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곳이 됐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웃들 간의 인심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주차분쟁이야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이웃 간의 소송도 꽤 일어난다.
소송 원인은 거의 모두 땅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울타리와 국가에서 관리하는 지적도상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인 탓에 땅을 돌려달라거나 사용료를 내라는 요구가 이웃 간의 분쟁을 불러오는 것이다. 주민 대다수가 사는 집의 울타리는 수십년 전부터 세워져 있는 것으로 주민들은 그 안에 이사와서 사는 것일 뿐인데도 지적도의 경계와 다르다고 서로 다툼을 벌인다. 근원적인 책임은 지적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지적도대로 울타리를 세우도록 지도하지 않은 국가에 있는데도 이웃끼리 서로 책임공방을 벌이며 재판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책임지려는 노력은 않고 이웃 간의 다툼을 방치해왔다. 최근에 빈번해진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도 국가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시민들의 근대적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의식은 높아져가는데도 국가는 그로 인한 분쟁을 예방·조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아파트 개발에만 주력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주민들의 경계 분쟁도 국가가 개발을 우선시하고 개개인의 편안한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발을 통해 이러한 분쟁이 해결된 면도 있다. 아파트단지가 개발되면 그 일대 토지가 아파트 소유자들의 공동소유가 돼 경계가 정리되기 때문인데, 이는 국가의 분쟁예방이나 조정노력 덕이 아니라 개발의 부산물로 얻어진 것일 뿐이다.
우리 동네는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는 도로까지도 개인소유인 곳이 상당수다. 이로 인한 분쟁도 간간이 일어난다. 통행의 자유는 기본권에 속하고 국가는 이 권리를 확보해줄 책임이 있는데도, 국가는 도로를 소유주로부터 사들이고 정비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는 서울시에서는 주민 주도로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는 마을 만들기 사업을 벌이고 있다. 공감가는 사업이다. 그러나 근대국가에서는 좋은 마을 만들기도 개인의 권리가 합리적으로 조정된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동네처럼 국가의 책임 방기로 인해 마을 만들기의 조건 자체가 파괴된 곳에서는 주민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 이런 곳에서는 그 조건을 만드는 일에 국가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은 추상적인 약속보다는 자기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혜택을 원한다. 이런 혜택을 직접 맛볼 수 있을 때 국민은 세금을 더 내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그때 보편적인 복지도 더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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