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쿠르트 로트쉴트 ‘윤리와 경제학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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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3-18 16:25 조회19,0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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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가치 중립’ 외치는 경제학, 그러나 분배는 이미 윤리의 문제다
한나 아렌트는 1950년대 이래 거짓말과 전체주의 체제 사이의 내적 관계를 심도 있게 논의해왔다. 다양한 책과 글에 산재해 있는 그녀의 성찰을 일일이 나열할 여유는 없지만, 그녀의 관심이 전체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유럽의 정치적 전통을 지탱하던 실존과 진리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었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냉전체제하 소련이 사회주의를 파멸로 이끌려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의 음모를 시도 때도 없이 선전했던 것이나,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가던 미국 당국이 자신들이 선전하던 공산진영의 음모를 확신한 나머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한 CIA의 정보를 무시했던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이 신봉하고 선전하던 음모론은 하나의 거짓말인데, 문제는 이 거짓말이 진리를 은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진리 자체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었다. 즉 있지도 않은 음모론을 통해 현실을 호도함으로써 현실의 실존성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아렌트는 자기기만이라 불렀고, 정세판단이나 과거사의 기억에서 등장하는 이 자기기만이 전체주의 체제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음을 비판했던 것이다.
부시 정권하에서 대량살상무기가 있으리라 확신하고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나, 얼마전 사저로 돌아간 전 대통령이 시도 때도 없이 내뱉던 거짓말을 생각해보면 이런 아렌트의 통찰은 지금도 시의적절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아렌트의 거짓말에 대한 성찰은 현실 정치에만 국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통찰과 성찰은 진리를 담보한다는 과학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원용되어야 한다. 그 까닭은 과학의 이름으로 주조된 정교한 이론 모델들은 자신의 시뮬레이션에서 다룰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변수들에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 자체의 리얼리티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들은 정교한 이론의 창출에 눈이 멀어 통제 불가능한 현실의 생생함에 등을 돌려 거꾸로 현실을 이론에 끼워맞추기 급급한 것이다. 쿠르트 로트쉴트의 <윤리와 경제학의 딜레마>(이학사)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이런 진리-현실 파괴의 선봉에 선 과학임을 설득력있게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생생함과 공평한 자원 배분 및 생산물 분배의 길, 즉 경제학적 진리를 지키는 방법을 탐구한 역작이다.
저자 로트쉴트는 유럽 유수의 경제 연구소인 ‘오스트리아 경제조사 연구소(WIFO)’에서 오랫동안 현실 분석에 매진해왔고, 린츠 대학 경제학과의 산파역할을 한 저명한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이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매우 명쾌하다. 경제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가치중립성을 내세우면서 재화의 이동과 균형을 객관적으로 기술-예측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자원 배분과 생산물 분배라는 경제학 고유의 대상 자체가 이미 윤리적일 수밖에 없기에 경제학의 가치중립성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근원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은 윤리나 가치의 문제에 등을 돌려왔고, 그것은 불공평하고 때론 정의롭지 않은 학설을 과학의 이름으로 설파해왔다. 로트쉴트는 신고전파 경제학을 지탱하는 기본 전제에 공리주의의 윤리 관념이 짙게 배어 있음을 출발점으로 삼아, 경제학의 여러 이론들이 윤리적 논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지적한다. 특히 수리 경제학의 여러 이론들을 소재로 해서 윤리 문제를 추출하는 솜씨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듯 생각된다.
사실 고백하자면 경제학의 이론이나 논리에 과문한 탓에 로트쉴트의 논의가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것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하나의 역설, 즉 신고전파 경제학이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하는 소득 균형은 이 학설이 전제하는 공리주의 철학의 원리에 반한다는 지적은 새겨 들어야 한다.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개인의 행복은 소득 수준에서 측정하면 절대적 소득이 아니라 타인과 비교해서 가늠되는 상대적 소득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수많은 면담 조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 균형 분배는 공리주의 철학의 행복 추구를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경제 정의 방향이다. 그럼에도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이를 외면하고 현존하는 소득 분배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경제민주화를 입으로만 외치고 모든 경제 분야에 신고전파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를 전면에 내세운 현재의 대통령이 아버지가 훌륭히 소화하고 체현했던 거짓말과 전체주의 체제 사이의 공모를 재연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항(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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