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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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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4-01 15:02 조회18,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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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오히려 움트는 꽃들을 예찬하는 듯한 초봄에 천안함 3주기를 맞게 됐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꽃피는 나이의 젊은이들임을 상기하면 봄은 역시 잔인한 계절이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이들을 애도하는 언사들은 넘쳐났다. “조국에 몸 바친 젊은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애틋한 사랑”이니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순국한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예찬되고, 국가적인 규모의 추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모의례가 대개 그렇듯 이번 3주기도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의 자기주장을 위한 빌미가 된 것도 사실이다. 용사니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이 죽음을 앞세워 안보위기와 대북 적대감을 고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실려 있다. 더 나아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들을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짓밟는 행태로 몰아가려는 불순한 시도조차 엿보인다. 과연 이런 애도의 정치가 ‘꽃다운 젊음’의 안타까운 죽음을 제대로 기리는 길인가?


천안함은 이제 단순히 침몰한 한 척의 함정이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세를 덮어쓴 안보이념의 상징물이 됐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희생자들도 군복무 중이던 평범한 젊은이들을 넘어 국가라는 신전에 바쳐진 봉헌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신화화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현실임을 일깨워주는 것이 천안함 생존자들의 목소리다. 이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정부의 ‘홀대’에 대한 원망은 죽은 이들의 우상화가 완성되어 가는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함께 당한 일임에도 죽은 이들은 ‘영웅’으로 칭송되고 자신들은 냉대를 받으니 어찌 곤혹스럽지 않겠는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천안함 병사는 생존자들을 ‘패잔병’으로 보는 시선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정부 발표대로 천안함의 침몰이 북한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 희생자들이 ‘용사’로 호칭된다면 생존자들도 똑같이 ‘용사’여야 옳다. 그러나 ‘용사’와 ‘패잔병’의 이 간극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왜 그래야 하는가? 북한에 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한 사고였다 해도, 이들의 죽음과 희생은 당연히 보상되고 기려져야 할 터인데 말이다.


원래 ‘패잔병’이라는 비난은 당시 침몰의 원인을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이라고 발표한 군지휘관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접전지역에서 참패한 지휘관은 중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 군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군지휘부가 수치스러워하기는커녕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태도로 북한 소행이라고 밝히던 황당한 장면을 필자도 기억한다. 그 때문에 이런 비난도 비등했던 것이지만, 성실히 근무하다 요행히 살아난 병사들을 어떻게 패잔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꽃다운 젊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국가 안전에 큰 위기를 초래했던 장성들이 그 후 도대체 어떤 합당한 징벌을 받았는지 의문이다. “아무 징후도 없었는데, 대응할 여지도 없었는데” 왜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패잔병이 되어야 하느냐는 생존병사의 볼멘 항변만이 귓가를 맴돌 뿐이다.

더구나 과연 그것이 북한의 공격에 의한 것인지의 의혹조차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문 제기는 여전하고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서는 이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재실험을 제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천안함의 진실 문제는 보수정권의 재집권 이후 점차 금기의 영역으로 묻혀가는 형국이다. 그동안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요구해왔던 민주통합당조차 이번 제3주기를 맞아 낸 성명서에서 ‘침몰’이 아닌 ‘폭침’으로 슬그머니 선회해버린 것이다.

매카시즘의 징후조차 엿보이는 이 상황을 두고 한 팝아티스트처럼 ‘천안함을 금기시하며 민주사회의 상식적인 의문조차 가로막는 자들은 북한에 가서 살아라’고 일갈할 용기가 없는 필자는, 단지 희생자들의 진혼도 생존자들의 치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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