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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리처드 세넷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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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4-17 14:31 조회18,1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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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협력을 매개로 새로운 ‘공존의 질서’ 구상

석사과정 때의 일이다. 하버마스의 <공공성의 구조변동> 세미나로 여러 책을 뒤지던 중 함께하던 선배 하나가 책을 한 권 읽자고 제안했다. <Fall of Public Man(공인의 몰락)>이란 책으로 공공성 논의를 위해 함께 읽으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나름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기라 흔쾌히 그러자고 호응했는데, 이런, 경험주의 사회과학 논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문학적 표현으로 가득 찬 영어 문장에 일단 좌절했고, 18~19세기 유럽의 정치-사상-문화-도시사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민첩함과 중후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헉헉대면서 세미나를 진행할 즈음 이 책을 읽자고 제안했던 선배가 한국어 번역본이 있었다며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아왔다. 한 줄기 구원이 빛이 비추는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이 번역본이 저자의 문장과 내용을 제대로 옮겼을 리 만무했기에 구원은 바로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읽은 이 책은 석사논문의 중요한 이론적 지지대가 되어주었고, 그 후로 리처드 세넷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되었다.


세넷의 신간 <투게더>(현암사)를 읽는 내내 이 기억이 되살아나 한편으론 즐겁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다.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Fall of Public Man>을 이렇게 쉽고도 깊이 있게 써줬더라면 석사를 훨씬 빨리, 조금 더 나은 논문으로 마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세넷에 대한 존경심은 더 커졌다. 이미 도시사회사와 유럽 사상사 분야에서 대가로 대접받는 그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사회 디자인을 위한 밑그림을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갈 길이 먼 연구자인 나에게 큰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 기획이 책상 머리에서 자료와 씨름한 결과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타인 및 사물과 교류하며 축적한 지각을 언어로 촘촘하게 엮은 직조물이었기에 그렇다.

 

이미 세넷은 <Fall of Public Man>에서 칸트 이래 하버마스로 이어지는 규범적 이상으로서의 공공성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수행적(performative) 공공성’이라 불릴 수 있는, 타인의 말과 몸짓을 알아듣고 승인할 수 있는 심리-육체적 상호교류의 장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공존질서임을 내세운 바 있다. 또한 <살과 돌>에서 세넷은 인간의 육체적 정동과 변용이 도시를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켜왔는지를 더할 나위 없는 명쾌함으로 제시했다. 이런 세넷의 작업들은 저 하늘 위에 빛나는 별로 상징되는 실천이성의 덕목으로부터가 아니라, 땅과 살과 사물에 밀착한 곳에서 형성되는 인간들 사이, 인간과 삼라만상 사이의 끈끈한 접촉으로부터 공존의 질서를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이번에 출간된 <투게더>는 그 전작 <장인(匠人)>과 더불어 3부작으로 구성될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의 한 권이다. 도시사를 다룰 마지막 권은 아직 쓰이지 않았지만, <투게더>만 읽어보더라도 그가 제안하려는 새로운 공존 질서를 위한 기획이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 기획이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수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인데, 바로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제안이다. 함께 사는 기술을 배우기,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진부한 제안임에 틀림없다. 그 기술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공장에서,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배우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세넷의 제안은 오래됐지만 그렇기에 잊혀진 소중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가 ‘협력’이라 부른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세넷이 ‘협력’이라 부르는 것은 가정이나 학교나 회사에서 배우는 기술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정과 학교와 회사는 함께 사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남는 기술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세넷이 말하는 협력은 마르크스에 빗대어 말하자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구조인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한 사회가 아니라, 인간들이 상호 협조하에 사물을 변형시켜 빚어내는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을 변형시키자는 제안이다. 인간이 사물을 만지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들 사이의 협력을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의 말과 몸짓을 알아듣고, 서로에게 배우는 일은 사물을 매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협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만이 아니라 인간이 내던져진 물질적 자연까지를 포함한 포괄적 세계 구성을 위한 기획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파괴적 국가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 새로운 공존 질서 구상을 위해 <투게더>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절실한 제안서이다.



김항(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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