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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오끼나와의 4월 28일, ‘굴욕의 날’이 질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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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15 15:43 조회20,5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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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의 4월 28일, ‘굴욕의 날’이 질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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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

 

 

지난 4월 28일 저녁 우연히 NHK 저녁뉴스를 보는데 대조적 두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아키히토 일왕 내외 등이 참여한 ‘주권회복 기념식’에 이어, 이 행사에 반대하는 일본의 최남단 오끼나와 주민집회가 보도된 것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일본 본토와 오끼나와의 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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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회복 기념식 행사와 오끼나와 주민의 반대집회

 

1945년 8월 일본은 2차대전에서 항복한 뒤로 한동안 연합군(사실상 미군)의 군정 치하에 놓였다가 1951년 맺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그 이듬해 발효됨에 따라 연합군 점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발효 개시일이 1952년 4월 28일이니, 올해로 61주년이 된다. 일본의 우익세력은 그 4월 28일에 ‘주권회복일’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1997년부터 민간 차원의 기념행사를 열었다. 자민당은 작년(2012년) 중의원 선거과정에서 ‘주권회복의 날’을 공식 정부행사로 치르겠다고 공약했고, 올해 그 공약을 지킨 셈이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조약 발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토와 분리된 채 미국의 시정권 아래 놓여 있다가 20년이 더 지난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강화조약 발효의 날을 일본에 버림받은 ‘굴욕의 날’로 여긴다. 그러니 정부가 나서서 기념식을 축하행사로 치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따로 항의집회를 연 것이다.

오끼나와대학 전 총장 아라사끼 모리떼루(新崎盛暉)는 ‘주권회복의 날’과 ‘굴욕의 날’이라는 이 날카롭게 대조되는 두 역사기억의 거리를 진작부터 ‘구조적 오끼나와 차별’의 소산이라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오끼나와인의 저항운동이 일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그 주장의 핵심을 잘 요약한 책이 작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곧 국내에도 소개될 것이다. 이미 그의 두 저서,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김경자 옮김, 1998), 『오끼나와 현대사』(정영신 옮김, 2008)도 간행된 바 있다.

그런데 이같은 오끼나와 문제와 주민운동이 지금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국민국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계기로서 집중 조명되고 있다. 희생자인 오끼나와에 ‘죄책감’을 느끼는 일본 지식인들이 그에 관심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간 무관심했던 중국어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쑨거(孫歌)는 일본 본토에서는 경험한 적이 없는 자유로운 정신과 억센 생활감각을 오끼나와에서 맛보고, 국민국가라는 단위에 갇히지 않는 감각을 배우려고 한다. 국민국가로 환원할 수 없는 풍부한 아이덴티티가 존재하는 오끼나와인의 정치적 경험에 대해, 왕후이(汪暉)는 오끼나와의 ‘애매한 독립성과 독특성’은 ‘민족독립’을 단순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주적인 새로운 정치형식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만의 첸꽝싱(陳光興)은 오끼나와 주민운동의 누적된 경험이 동아시아 연대와 세계변혁의 추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에서도 냉전기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체험을 공유하면서 오끼나와에 관심을 갖는 움직임이 1990년대 이래 이어져왔다.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그들과의 연대운동도 점차 추진되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 속의 오끼나와가 ‘발견’된 셈이다. 아라사끼 모리떼루 저서의 간헐적 출간도 그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최근 책을 읽다가 동아시아 ‘비판적 지식인’들의 오끼나와에 대한 관심에 대해 가해진 쓴소리를 접하게 되었다. 간단히 옮기자면, ‘일본의 존재방식’에 대한 비판을 위해 오끼나와를 일종의 ‘메카’로서 정치화하다 보면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화’해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제기다. 오끼나와에 대해 말하지만 주민의 고통에는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는 채 일본 비판의 방편으로밖에 다룰 수 없다면 그것은 ‘오끼나와의 관객화’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洪玧伸, 「韓國における沖繩學の現在」, 富山一郞/森宣雄, 『現代沖繩の歷史經驗:希望、あるいわ未決性について』, 靑弓社, 2010)

오끼나와를 일본 비판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태도는 이번 4월 28일의 주민시위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에서도 물씬 드러난다. 그동안 오끼나와 주민의 반기지운동이나 그 배후에 작동하는 오끼나와-일본-미국의 연결구조, 곧 ‘구조적 오끼나와 차별’에 눈감고 그 연결고리인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존재를 당연시하며 별 관심이 없던 한국의 보수신문이 그날의 시위를 크게 보도한 것은 그 단적이 예가 된다. (「‘아베 만세삼창’에 분노한 오키나와 “日서 독립하고 싶다”」 『조선일보』, 5월 2일자)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고 재무장을 추진하려는 아베정권의 움직임을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그에 저항하는 오끼나와 주민운동이 때마침 주목된 것이다.

보수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끼나와를 일종의 ‘메카’로서 정치화”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심문에서 자유로운가. 필자가 아는 한, 오끼나와의 비판적 지식인에게는 외부에서 자기 지역에 과잉기대를 거는 데 부담스러워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작년 상하이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오끼나와의 와까바야시 치요(若林千代) 교수가 “오끼나와 속에서 오끼나와를 정말로 비판적으로 검증하고 전체로서 사회를 전진시키는 상태가 중요하다”고 명확히 밝힌 것은 그런 자각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증거라 하겠다.

그렇다면 오끼나와 밖의 지식인들이 이와 같은 오끼나와 지식인의 성찰적 자각에 호응하면서 지역주민의 고통을 포함한 총체적 삶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물을 차례이다.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하려면, 오끼나와인이 겪어온 역사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 또는 접간적으로 서로 연루되어 있음을 깊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중화제국-일본제국-미국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의 이동에 의해 위계지어진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연동하는 오끼나와와 우리의 역사에 드리워진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일은 동아시아인이 4월 28일을 기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서남포럼, 201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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