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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가벼운 병'과 국민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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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22 18:35 조회20,4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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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충남 당진의 어느 공장에서 다섯명의 근로자가 한꺼번에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작업하는 공간에 차 있던 아르곤 때문이었다. 이들이 작업하는 동안에는 그곳에 아르곤을 넣으면 안되지만, 공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일찍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 미리 아르곤 주입관을 열었다. 아르곤이 공기 중에 섞여 들어가면서 산소 농도를 떨어뜨리면 질식 위험이 높아진다. 이걸 알면서도 미리 아르곤을 넣었으니 사람의 목숨보다 돈벌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사고는 수없이 일어난다. 얼마 전에는 여수에서 작업장 폭발사고로 많은 분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책임자가 조사를 받고 배상이 이루어지지만 사고는 그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 인명보다 돈벌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공장을 폐쇄해 가동을 중단시키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돈벌이를 하려 한다면, 아예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공장을 폐쇄하면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공장의 노동자는 물론이고 납품업체, 하청업체 등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가 없어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정부의 감독기관에서 늘 그래왔듯, 사람 목숨보다 돈벌이를 중요시하는 기업이라도 최소한의 처벌만 하고 계속해서 돈벌이를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돈벌이를 위해서는 인명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이게 아마 대통령부터 보통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 대다수의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진이나 여수 사고와 같은 일이 일어나도 화를 삼키며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일자리와 돈벌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미국의 어느 철학자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임금노동은 ‘가벼운 병’이다. 이 병은 감기처럼 며칠 지나면 낫는다. 수요일쯤에 걸린 이 병은 금요일 저녁이 되면 사라진다. 가벼운 병이니 사람들은 돈벌이의 ‘부수적 피해’ 정도로 생각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일을 그만둘 때까지 병을 달고 산다.

그러나 가벼운 병이라도 오래 지속되면 고통스럽다. 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만 하니 이 욕구는 억압된다. 병을 달고 다니고 그것을 치유하겠다는 생각도 억눌러야 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

병을 치유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지금 하는 돈벌이를 위한 일을 그만두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철학자는 디트로이트의 GM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회사가 어려워져 해고될지도 모르는 노동자에게 철학자는 회사 일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노동자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 학교, 교회 등에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말만 들었지, 그런 물음은 처음이라면서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힐링이 유행이다. 그런데 이 힐링에서 돈벌이 노동이라는 ‘가벼운 병’의 치유는 안중에도 없다. 오히려 매주 수요일에 걸리는 이 병이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낫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병을 참고 견디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힐링은 현 정권의 ‘국민행복시대’와 끈이 닿는 것 같다. 그들의 ‘국민행복’은 우리 사회에 ‘가벼운 병’을 가능한 한 널리 퍼뜨려야만 얻어진다. 이 병을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 주는 힐링은 여기에 크게 기여한다.

‘행복시대’는 많은 국민을 ‘가벼운 병’에 걸리게 해야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병을 조금 편안하게 견디도록 해주는 힐링을 통해서도 오지 않는다. 병을 치유해야만 얻어진다. 그러려면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누구나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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