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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대선후보들, 문제는 ‘민주주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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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26 12:09 조회21,7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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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통령 후보의 아들이나 딸이 유괴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범인은 유괴한 아이를 어느 야산의 움막에 가두어놓고 수십억원의 몸값을 요구한다. 수사팀은 아이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는 한편, 몸값으로 지불된 돈다발 속에 전자칩을 숨겨넣어 추적한 끝에 범인을 검거한다. 이제 남은 일은 아이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은 자기를 풀어주지 않으면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버틴다. 아이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손발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생존 확률이 낮아진다. 수사팀은 결국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먼저 가혹한 구타부터 시작한다. 효력이 없자 물고문으로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전기고문을 당하자 범인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 숨긴 곳을 털어놓는다.

아이가 살아 돌아오고, 국민들은 안도한다. 수사관들은 대통령의 오찬에 초대되고, 일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는다. 이때 어느 후보가 고문을 가한 수사관과 이들을 격려한 대통령을 비판한다. 범인의 기본권을 심하게 침해한 수사관들을 징계가 아니라 포상한 것은 민주주의를 심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후보들은 국민감정을 등에 업고 아이가 곧 죽을지 모르는 긴급상황에서 강압적 수단을 사용해 자백을 받아내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기본권 침해를 비판한 후보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에게 당신은 이 경우 어떤 견해를 취하겠느냐고 물으면 후보들의 차별성이 크게 드러날 것 같고 선거전이 조금 덜 지루해질 것 같다. 사실 대통령 선거가 두 달쯤 남은 지금 후보들의 과거 행적이나 역사인식에 대한 검증은 꽤 활발하게 벌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도 쏟아져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검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검증은 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어떠한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렀지만 후보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검증하는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후보들의 과거 행적이 인물 검증의 전부였고, 경제공약이 정책 검증의 중심을 차지했다. 한 번도 민주주의의 유지나 발전과 관련된 구체적인 질문을 들이대며 검증을 해본 적이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기본권 존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정권 치하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 졸이며 또는 분노를 삭이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후보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좀체 말이 없다. 대검 중수부를 없애겠다거나,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겠다거나,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등 변죽울리는 말만 하지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상황을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진단하고, 그동안 민주주의가 얼마나 훼손됐는지 얘기하고, 당선된다면 아니 당선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진전을 위해 어떻게 일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공권력이 유괴범을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행위에 대해서도 은근히 찬성하거나 슬쩍 얼버무리며 지나가려 할 것이다.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는 일자리 창출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슈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지난 5년이 그걸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자리는 창조경제를 하든 혁신경제를 하든 또는 혁명을 하든 크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계 경제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어느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상당히 진전할 수도 있고 크게 퇴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보다 공들여서 검증해야 할 것은 후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대통령 치하에서 다시 5년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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