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장 스타로뱅스키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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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2-07 13:04 조회21,6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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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8세기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루소 텍스트 제대로 읽기
바흐의 평균율, 린네의 생물분류학, 흄의 급진 경험론, 칸트의 비판기획, 볼테르의 정치 풍자, 애덤 스미스의 도덕경제학, 이 일련의 인문(humanitas) 기획은 모두 18세기 유럽에서 꽃폈다. 분야와 형식은 달랐지만 이들 기획은 이전 세기의 종교혁명과 주권국가 체제의 성립에 힘입어 인간이 스스로의 지적 능력, 도덕적 자긍심, 그리고 미적 판단력을 구사하여 합리적이고 수평적이며 자유로운 역사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른바 ‘계몽주의’의 이름으로 후대에 평가될 이 세기는 감히 알려 하라는 칸트의 언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어떤 자연적이거나 신적인 권위에 기대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자율적 힘으로 조화로운 질서를 일구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기의 끝자락에 프랑스혁명이 자리함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의 이치였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과연 18세기는 ‘빛(lumier)’의 시대였다. 바흐의 명랑함, 볼테르의 우상파괴, 그리고 칸트의 비판기획이 극명하게 보여주듯 이제 사람들은 교회와 세속 권력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빛을 온몸으로 쐴 수 있었고, 그 빛에 노출되어 자유를 얻게 된 스스로의 지성과 육체를 도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단련시켜야만 했다.
이제 진리, 올바름, 아름다움은 수도승의 묵언수행이나 신비가의 계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삼라만상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박물학적 경험합리론에서만 인식-획득 가능한 것이 되었다. 계몽주의란 이렇듯 밝고 명랑한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인문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지성사가 및 문화사가들은 이런 18세기의 계몽주의 속에서 빛의 투명성과는 매우 이질적인 흔적들과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밝고 명랑한 인간 세계의 이면에서 빛이 들지 않고 습한 곳에 거주하는 디드로의 괴물 형상이 그렇고, 칸트가 인간 지성의 임계지점을 지시하는 숭고를 말하는 곳에서 거론하는 구토의 경험이 그것이다. 디드로의 괴물은 밝고 투명한 인간 세계가 스스로의 명증성을 획득하는 근거였으며, 칸트의 구토 경험은 숭고의 경험과 정반대의 수직적 지평에서 인간 지성의 임계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어둠 없이 빛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기는 하지만, 계몽주의의 텍스트 안에서 많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주제화하지 않은 채 남겨놓은 이 일종의 어둠의 계보는 지성사가들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18세기는 칸트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사드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어둠의 계보가 디드로의 괴물과 칸트의 구토경험처럼 텍스트 속의 자그마한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빛과 대등한 비중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일련의 텍스트들이 있다. 바로 장 자크 루소의 텍스트가 그것이다. 루소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지성사가들의 계몽주의 및 혁명론을 양분시킨 장본인이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헤겔에서 카시러와 하이데거를 거쳐 아렌트에 이르기까지, 루소 텍스트에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계기는 커다란 골칫거리였고, 후대의 철학자, 지성사가, 문화사가들은 루소의 빛과 어둠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루소론을 썼고 루소상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에 대한 판단 또한 양립하기 어려운 대립 양상으로 서술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7년에 등장한 스타로뱅스키의 <투명성과 장애물>(아카넷)은 이런 루소론의 계보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획기적 저작이다.
저자는 빛과 어둠(즉 투명성과 장애)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는 빛과 어둠이 각각의 한계지점에서 서로 교차하는 것이야말로 루소 텍스트의 아름다움이며, 그런 까닭에 루소의 광기란 계몽의 광기이자 광기의 계몽이라 파악한다. 그는 루소 텍스트의 충실한 독해를 통해 18세기를 일면적 계몽의 시대가 아니라 빛과 어둠의 임계적 공존의 시대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이런 내재적 독해는 데리다로 하여금 탁월한 루소론을 가능케 했으며, 1960년대 프랑스 철학 및 문학비평이 전 지구적으로 지적 영향을 가지게 한 원동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스타로뱅스키의 이 기념비적인 저작을 한국어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영역이나 일역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뛰어난 번역으로 말이다. 옮긴이에게 무한한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연말을 이 아름다운 책과 보낼 수 있다는 들뜬 마음을 쑥스럽게 고백해 본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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