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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이상한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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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2-10 17:34 조회21,8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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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퀴즈 하나가 있다. 이것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내 가족, 내 이웃까지 병들게 한다. 이것에는 발암성 물질인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뮴이 들어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물론 정답은 담배다. 위의 퀴즈는 내가 이 글을 쓰면서 피우고 있는 담배의 포장지에 씌어 있는 경고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정도의 경고문은 온건한 편이다. 한 외국담배의 포장지에는 반쯤 썩은 듯한 폐의 흉측한 사진을 올려놓았다.

남성성과 일탈의 기호에서 죽음의 기호로


내가 늘 이상하게 생각해 온 건 이것이다. 왜 담배를 불법화하지 않는 걸까. 내 몸을 썩게 만들고 내 가족과 이웃까지 병들게 만드는 상품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국가의 법이 금지해야 하지 않는가. 더 이상한 사태는 이 상품이 스스로 자신의 해악성을 언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팔리는 것이 소명인 상품이 자신을 사려는 소비자에게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이웃 모두에게 치명적이다'라고 협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모두에게 규탄 받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규탄하는 상품이라니.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보다 더 이상한 상품은 없다.


20세기의 담배는 하나의 기호품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소년 소녀들에게 유혹적인 일탈의 기호였고, 성인 남자들에게 남성성을 보증하는 기호였다. 20세기 대중문화 특히 영화는 담배라는 기호(記號)의 기호(嗜好)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담배 연기로 가득하지 않은 필름누아르의 탐정사무실, 담배를 물고 있지 않은 험프리 보가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까.


20세기 영화에 빠져 살아온 내게 20세기의 이미지는 담배연기 없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20세기의 공기의 일부였다. 이 절대적으로 친숙한 기호가 죽음의 기호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의 시대정신인 '웰빙'이 남성성과 일탈의 대표적 기호에 죽음의 공포를 새겨 넣었다.

담배를 핑계로 21세기의 건강염려증자들을 비웃고 20세기의 낭만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갑의 담배라는 상품에 새겨진 분열증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스스로 치명적이라고 명시하는 이 분열증의 상품은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고지의)의무를 다했으니, 우리의 것을 소비하고 죽든 말든 그건 당신의 책임이다.'


담배의 분열증은 모종의 타협의 산물이다. 금지되어 마땅한 상품이 금지 대신 상품으로서의 자기부정이라는 분열증을 떠맡은 셈이다. 그 분열증은 담배 소비자 개개인에게 다시 떠넘겨지고 금지는 그들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일까. 담배회사의 로비 때문이라고 말하면 쉽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스템이 담배회사와 담배농가의 붕괴를 포함한 담배산업의 소멸, 그로 인한 엄청난 세입 감소와 사회적 비용을 아직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허언 방증하는 담배라는 상품의 분열증


담배의 분열증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자본주의 문명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고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우리가 당신의 안전과 충족을 약속한다.' 그 약속에는 '만일 당신이 적정한 비용을 지불하기만 한다면'이라는 문장이 괄호쳐진 채 항상 따라다닌다.


담배의 분열증은 괄호 속의 문장만 진심이고 약속은 허언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작성해 온 위험과 결핍의 끝없는 명단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 위험과 결핍의 확대 재생산이야말로 이 문명의 진정한 발명이다. 그것은 컴퓨터 화면에 반복 등장하는 '업그레이드'의 유혹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 내게 더 필요한지조차 모르면서 클릭하지 않으면 위험(바이러스로부터의) 결핍(새로운 성능의)에 처할 것이라는 불안을 조성하는 유혹.


위험과 결핍의 발명이 멈춰질 수 없으며 그것이 시스템에도 개인에게도 성공의 가장 확실한 길로 권장되고 보장되는 세상에서, 담배는 위험과 결핍의 제거가 아니라 그것의 초래를 고백하는 유일한 상품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이 괴이한 얼룩 앞에서, 30년 흡연자인 나는 '웰빙'을 위해 담배의 법적 금지를 찬성하지만, 이 얼룩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허문영 영화의전당 프로그램 디렉터
(부산일보, 2012. 12. 10 ; 매일신문, 201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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