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시대의 야만 고발하는 '미학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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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02 17:24 조회28,43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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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로서 시를 해석하는 나의 태도를 얘기해보자면, 난 시의 화자를 믿는 쪽이지 시인을 믿는 쪽은 아니다. 더 솔직하게는 난 시의 화자, 시집 속 말의 세계에 관심이 있지 시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시사IN>에서 올해의 시집으로 선정한 <훔쳐가는 노래>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시인 진은영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불가피할 듯하다.
적어도 지난 2~3년간 시인 진은영은 한국 시단과 평단의 가장 뜨거운 아이콘 중 하나였다. 지난 2~3년간 그녀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으며, 시의 정치성 논의를 촉발시킨 탁월한 문학이론가이기도 했다.
[훔쳐가는 노래] 진은영 지음창비 펴냄 이 시집을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는 물론 독자의 몫일 것이나, 적어도 이 시집의 의의를 좀 더 잘 살펴보려고 할 때 이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인 면이 있다.
<훔쳐가는 노래>는 낯선 이미지와 아름다운 비유를 구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한 모더니스트 시인이, 고유한 자기 문학적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어떤 방식으로 자기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것인가와 관련해 흥미롭고 감동적인 응전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응전 방식 보여줘
때로는 모호한 이미지로 때로는 배후를 숨긴 복합적 진술로, 때로는 알레고리로 때로는 풍자와 아이러니로 형상화된 다양한 화법의 범상치 않은 얼굴을 한 이 시집 속의 ‘정치시’들은, 그녀가 본래는 문학의 정치성을 향해 모든 것을 기투하는 이른바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가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예컨대 발표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낯선 정치시 몇 편을 얘기해보자.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로 시작되는 ‘오래된 이야기’는 현 정부에서 작가들의 가장 큰 공분을 샀던 사건인 ‘용산 참사’를 알쏭달쏭한 퀴즈처럼 다루면서도 은밀하고 은은하기까지 한 서정의 광채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 ‘그 머나먼’은 박노해와 혁명을, 달콤한 노란 마카롱과 소녀들과 깃털구름의 옆에 두고서 함께 노래한다. 따라서 이 시는 정치시인 동시에 한 편의 아름다운 청춘연가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에서는 흥미로운 비유들과 예리한 냉소가 여기저기서 번뜩이며,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에서는 1980년대의 기념비적인 저항시인과 우리 시대의 사회적 위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치 아이콘과의 격정적인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있다’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서늘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줌으로써 이 시인의 직업이 본래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진은영(오른쪽)은 지난 2~3년간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으며, 시의 정치성 논의를 촉발시킨 탁월한 문학이론가로 활동했다.
요약컨대 이 시집은 정치도 문학도, 삶도 예술도, 행동도 사유도, 시민과 시인의 그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창의적인 실험의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난 이 시집이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적 야만성을 온몸으로 고발하면서도 결코 ‘미학’을 포기하지 않으려 고투한다는 점에서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시인은 야만과 참혹의 민낯을 마주하면서도 그것을 ‘아름답게’ 그려내기 위해 전력해야 한다. 이는 예술가의 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무’에 속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삶의 리얼리티와 생생하게 마주하는 문학만의 고유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시사in live, 201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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