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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낡은 패러다임의 부활에 맞설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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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07 15:49 조회24,1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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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행정부 수반이 교체된다고 일상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대통령이 당장에 필요한 돈을 융통할 수 있게끔 금융 제도를 바꿔 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보다 전세금을 몇 천 만원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를 원천봉쇄할 리도 만무하며, 지금까지 매진해온 공부를 내일부터 때려치울 수 있도록 입시 정책을 확 뒤집을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마음이 허하고 가슴이 답답한 까닭은 다음 세대의 삶까지를 시야에 넣은 장기적인 패러다임 변화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대통령은 새로운 사람이 취임하겠지만 패러다임은 완전히 낡은 것이 부활할 것이며, 새 정부가 말하는 새 시대란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 이광수가 말했던 새 시대 정도의 새로움 이외의 것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좀처럼 ‘멘붕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새 정부가 부활시킬 낡은 패러다임이란 무엇일까? 그건 세상 사람의 수없이 다양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는 ‘진리의 획일화’이다. 대통령 당선인의 부친이란 자가 추동했듯이, 이 땅의 근대화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민족의 ‘자기혐오’를 원동력으로 삼았다. 더럽고 게으르고 멍청한 조선민족을 개조하라는 20세기 전반 기득권 계층의 자기 민족 혐오는 5·16 쿠데타 이래 근대화를 국시로 한 독재 정권에 고스란히 계승되어 ‘새마을 운동’이란 자기 파괴적 운동을 만들어냈다. 낡은 것은 허위고 새로운 것은 진리라는 이 끔찍한 가치의 전제 위에서, 이 땅의 인민들은 옆집 이웃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질시와 시기와 선망 혹은 멸시와 차별과 모욕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김수영이 말한 ‘거대한 뿌리’는 뽑혀 이제 어느 아파트에 살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가 타자와 마주하여 그를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지고한 잣대가 되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기 이래로 무수한 저항을 짓밟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 패러다임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19세기 말 이래의 서구 문명에 대한 수용방식이다. 그 방식을 한 마디로 하자면 과학기술 중심의 진리관이다.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실력을 양성하자던 친일파가 신봉한 것이 이 과학기술이며 이에 바탕을 둔 부의 증식이었다. 그 친일파가 고스란히 실권을 장악한 해방 후에도 이 가치관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 과학기술 중심의 진리관은 천박한 자유주의(자기혐오)와 결합하여 세상은 이 유일한 잣대 아래에서 가늠되고, 이에 맞춰서 삶의 방향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즉 19세기 유럽을 풍미하던 과학기술 중심의 실증주의적 진리관이 유럽에서보다 더 벌거벗은 채로 순수하게 세상을 지배한 것이 20세기 한국의 패러다임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을 목표로 서구의 철학사를 문제화한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문학동네)은 지금 이 땅에서 절실한 책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버마스나 데리다로부터 보수주의와 낡은 형이상학을 설파한다고 힐난당한 가다머가 21세기에 웬말이냐고. 그러나 그런 수박 겉핥기식의 아는 체는 무시하도록 하자. 가다머가 패전 직후의 독일에서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과학기술 중심의 실증주의를 비판한 까닭은 좁게는 독일, 넓게는 유럽의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이 나치를 잉태했다는 통렬한 반성의식이다. 그가 볼 때 과학적 방법 이전의 ‘이해’(verstehen·일상어로는 ‘알아듣다’를 뜻한다)의 세계는 잘 짜여진 방법적 원칙으로 의미나 진리치를 가늠할 수 없다. 그가 열쇠말로 삼는 지평(horizon)은 그리스어 ‘가로지르다 (hourizo)’를 어원으로 하는데, 지평(경계선) 사이에서 결정 불가능한 중간지대에서 과거와 현재를 가교하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양태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거창한 것은 아닐 터이다. 상대방의 말을 획일적 진리의 방법으로 재단하기 전에 일단 ‘알아듣는’ 지평의 확보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행정부의 수반일 터이기에 더욱 절실하고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2000년에 제1권이 번역된 지 12년 만에 완역된 이 현대철학의 고전을 이 땅에서 부활하는 저 끔찍한 패러다임에 마주 세워 비판의 무기로 삼을 수 있을까? 그리 밝지만은 않은 새해 벽두에 조심스레 물음을 던져본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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