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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박근혜 시대에 적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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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16 14:37 조회22,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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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하도 터무니없는 꼴을 겪었기에 지난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국민 과반수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망하게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낙담을 넘어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만나면 피차 위로를 건네었고, 헤어지면 혼자 긴 우울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체로서는 귀한 경험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고통 없이 어찌 참된 성숙에 이를 수 있겠는가.

대선 이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책들의 판매가 급증했다는 뉴스를 보고도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오늘의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를 역사의 맥락 속에서 탐색해보려는 노력이 늘고 있다는 것은 분명 희망의 조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사실은 역사서 구매층이 주로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한 인터넷서점의 집계에 따르면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구매자의 30.7%가 20대 여성, 23.1%가 30대 여성이고 전체 남녀 비율은 35.3% 대 64.7%라고 한다. 전체 구독자의 절반 이상이 20, 30대 여성인 셈인데, 이 지나친 불균형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사실 이번 대선을 통해 입증된 것 중의 하나는,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독서문화의 취약성 즉 우리 사회 전반의 지적인 빈곤이다. 그런 측면과 결부해서 더 지적한다면 독서문화의 기반이 되는 교육 현실의 황폐화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 알 수는 없으되, 선거 기간 중 ‘반대한민국적’이란 말이 야당 후보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말을 통해 의도한 주관적 목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실제 언어 사용에 의해 객관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 말의 사용자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유래와 대한민국 헌법의 형성 과정에 대해 아주 무지하거나 극히 왜곡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카시즘의 원조인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가 그러했듯 한국의 극우 논객들도 대부분 말의 품위를 지키고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쨌거나 이제 우리는 박근혜 시대 5년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현명하게 적응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할 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또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가 어떻게 불리한 국면을 돌파할 수 있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야권에서 줄기차게 물고 늘어진 쟁점 중의 하나는 그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합법정부를 총칼로 뒤엎고 정권을 잡았으며, 통치기간 18년 동안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자유와 인권을 억압했다는 것은 만인 공지의 사실이다. 딸인 박근혜 자신도 유신 기간의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한 바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 독재의 죄과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딸에게 책임을 물을 바에는 그가 정계에 입문하던 1998년의 시점부터 물었어야 옳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박정희가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다. 그의 정부가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실을 공공연히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에게 그것은 지금의 일상생활과 떨어진 역사의 일부이자 한갓 정치쟁점으로 축소되어 있다. 반면에 그 탄압의 대가로 축적된 물질적 부는 현재의 풍요를 가져온 필수적 전제로 미화되고 있다.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전쟁의 승리가 다만 장군의 공훈으로 기억되는 것과 같은 역사의 부조리가 박정희의 이름에는 새겨져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선거 때마다 그 부조리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고, 민주개혁세력은 그 부조리가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암초임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상 박근혜는 매순간의 정치적 결정과 정책적 선택을 통해 박정희의 역사적 유산을 현실 속에서 해석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막중한 업무의 수행을 통해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신의 독자적인 이름을 역사에 기록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필요한 비판을 마다 않음으로써 그의 성공을 돕는 것은 물론 그것이 우리의 삶에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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