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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자주독립을 위한 고난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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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25 10:34 조회22,0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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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의 길

  2011년 초 <한겨레>에 연재된 김자동(金滋東) 선생의 회고록「길을 찾아서 ―임정의 품안에서」를 연재 당시에는 읽다말다 했던 터라, 지난 연말『상하이 일기』(두꺼비, 2012)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단 소식을 듣고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구입했다. 하지만 대선 전후의 어수선함 때문에 독서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새해 들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오늘을 더 잘 이해하려면 어제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자세로, 그러니까 대한민국 이면사를 공부하는 셈치고 책을 잡았다. 그러자 기왕이면 김 선생의 자당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여사의 회고록『장강일기(長江日記)』(학민사, 1998)부터 읽는 것이 순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책을 차례로 읽고 나서 내용을 소개하려니, 우선 책들의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절실하다. 어떤 분들에게는 정정화•김자동의 삶이 웬만큼 알려져 있겠지만, 더 많은 분들에게는 전혀 낯설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도 <한겨레> 연재 이전에는 그분들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이야기는 김자동의 조부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 선생으로 소급한다.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농은 개화파에 속하는 구한말 고위관리로서 독립협회•대한자강회 등의 개혁지향 단체에 관여했다. 국권침탈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뒤에 이를 반납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 대동단의 총재가 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그리고 1919년 10월 아들 의한(毅漢, 1900~1964)을 대동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구한국 고위층의 망명은 외신(특히 중국 신문)에 일제의 침략정책을 폭로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널리 보도되었다. 동농은 당시 임정사회에서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이시영(李始榮, 1869~1953)•김구(金九, 1876~1949)•안창호(安昌浩, 1878~1938) 등보다 한 세대 연상의 원로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대한제국-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로 존중받았다.

  정정화는 겨우 열한 살 때 동갑나기 김의환과 결혼하여 소꿉놀이하듯 신혼을 보냈다. 그러다가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하자 정정화도 두 달 뒤인 1920년 1월초에 국경을 넘는다. 연로한 시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네 시아버님께서 여생을 편히 지내시고자 해서 상해로 가신 건 결코 아니다. 상해생활은 여기와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그러나 생활이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막을 생각은 없다.”(『장강일기』, p.47; 이하 <장강>으로 약칭)고 염려하는 친정아버지를 안심시키고 거금 8백 원까지 지원받았다. 정정화의 상하이 도착은 홀아비 처지가 많은 임정 어른들에게는 재바르고 헌신적인 살림꾼의 출현이었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그때부터 1946년 5월 귀국 때까지 4반세기가 넘는 동안 임시정부의 중견간부로서, 또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은 숨은 일꾼으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두 책은 바로 그 시대의 기록이다.

  상해임정의 법통

  헌법 전문에 명기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4•19민주이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채택 속에 이미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이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해방후 이승만•박정희 정권들에 의해 그 본연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대한민국 건설과정의 항일독립정신이 무참히 유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양자가 각각 따로 강조된 것이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란 것은 구체적인 역사현실과 유리된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일 수 없다. 또한 그것은 해석 분분한 메마른 법조문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없다. 한마디로 그것은 주권침탈의 식민지상황에서 나라의 자주독립을 되찾기 위해 투쟁했던 모든 선열들의 실존적 삶 속에 육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령 김구 선생의『백범일지(白凡逸志)』(1947)나 장준하 선생의『돌베개』(1971) 같은 책들은 그 개인들의 자전적 기록임을 넘어 대한민국 형성사의 불가결한 일부이다. 그렇다면 그 책들은 단순한 교양서 이상의 것으로서, 즉 국민 필독의 교과서로서 만인에게 읽혀져야 마땅하다. 정정화의『장강일기』에서도 나는 그런 책들에 버금가는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김자동의『상하이 일기』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저서이다. 저자는 1928년 상하이에서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임정 어른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따라서 당연히 상해임정에 대한 그의 묘사는 그 자신의 체험을 직접 반영한 것일 수 없다. 임정이 그의 기억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정이 상하이를 탈출한 이후인데, 그러나 이후에도 소년적 시선을 넘어서는 심층적 관찰이 가능해진 것은 충칭(重慶)시대 말기 즉 일제패망 직전에 이르러서일 것이다. 요컨대 그의 저서는 제목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일기’의 요소를 아주 조금밖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상하이 일기』는 순수한 회고록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사후에 재구성된 비평적 논픽션이라고 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1919년 10월부터 1950년 말까지의 기간에 걸친 그의 가족사이자 개인사, 그의 시점으로 서술된 동시대의 민족사이자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점 자체가 이 책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은 아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애국자들

  『장강일기』가『상하이 일기』저술의 기본적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양자 간에는 당연히 겹치는 일화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똑같은 사건, 똑같은 인물에 대한 서술이라 하더라도 자기 체험의 직접적 묘사인 경우와 타자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는 독자에게 주는 문학적 효과가 아주 다르다. 수많은 일화들 중에서 하나만 예시하기로 하겠다.

  정정화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안 1920년 3월부터 1930년 7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국내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처음 세 번은 임정의 밀령에 따라 운동자금을 모금하려고 지하조직 루트를 이용해 잠입한 것이었다. 그 루트란 연통제(聯通制)를 말함인데, 그것은 “임정 초기에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어 실시된 비밀통신 연락망으로서 …국내와의 통신업무 및 재정 자금조달 등을 위해 교통국과 함께 이원화되어 운영되고 있었다.”(<장강> p.58) 이 방법으로 정정화가 국내에 들어온 코스는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안동현(지금의 단둥)까지 오고, 거기서 신의주로 건너와 다시 안내를 받는 것이었다. 당시 안동에서는 최석순(崔錫淳)이란 분이 왜경의 형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내왕을 도왔고, 신의주에서는 양복점 주인이자 재단사로 일하는 이세창(李世昌)이란 분이 은밀하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비밀요원들인 셈이었다.

  배로 안동에 닿자마자 나는 임정의 지시대로 우강(최석순)을 찾았다. 우강은 나와는 첫 대면이었고, 상해에서 젊은 여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내 신분을 확인하고는 신의주로 안전하게 넘어갈 방도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우강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우강과 상의한 끝에 그의 누이동생으로 가장하기로 했다. 결국 왜경 형사의 누이동생이 된 나는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무사히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장강> p.59)

  이세창은 무척 소박하고 착한 성품에 배운 것도 별로 없는데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권력자들의 압제나 받으며 살아오던 서민 중의 서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나설 이유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 보는 정정화에게 차표를 끊어다주고 안전하게 역까지 안내해주는 헌신성을 보였다. 열차에 오르기 직전 그는 거센 평안도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그 말은 그때 그 말을 직접 들은 정정화에게만이 아니라 거의 1세기가 지나 책으로 그것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통렬함을 발휘한다.

  “몸조심하라요. 자기만 생각할 거이 아니라 남도 생각을 해야 되는 일이야요. 기래야 또 들어올 수 있으니까니. 명심하라요. 내레 솔직하게 한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시다. 독립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장강> p.60)

  그로부터 60년 이상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회고록을 쓰면서 저자가 이세창의 말을 얼마나 정확히 옮겼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투박한 사투리 한마디 한마디가 화살처럼 우리의 폐부에 꽂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때 그 말을 듣는 당사자에게도 그런 점이 가슴을 때렸을 것이며, 그랬기 때문에 그 감동이 두터운 세월의 지층을 뚫고 되살아나 80대 노인의 손으로 하여금 그 진실을 기록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정화가 두 차례 국내잠입에 성공한 이후 안동현과 신의주의 거점들은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최석순은 다행히 가족과 함께 탈출하여 상하이로 왔지만, 이세창은 경찰에 체포되어 소식이 없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곳곳에 숨어서 활약한 이세창씨 같은 분이 없었더라면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남긴 독립투사들의 공적도 물거품같이 허망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장강> p.72) 저자의 이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일화는『상하이 일기』에도 짧게 나오지만, 다음과 같이 밋밋하게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어머니에게 전해 듣거나 어머니의 책을 참고하여 서술한 것이므로 불가피한 노릇일 것이다. 어쨌든『상하이 일기』의 이 대목은『장강일기』의 구체적 묘사가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감동에는 근접하지 못한다.

  1921년 말이 되면서 임시정부의 연통제는 대부분 붕괴된다. 가장 안전한 연결고리였던 안둥현의 조지 쇼가 왜경에 체포되자 연통제 조직이 전혀 가동되지 못했다. 신의주에서 활동하던 이세창도 체포되어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했다. 안둥현에서 활동하던 우강 최석순도 부인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상하이 일기』p.45; 이하 <상하이>로 약칭)

  만리장정(萬里長征)의 피난행렬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왜경에 체포되고 임정요인들 대부분은 상하이 프랑스조계를 도망치듯 급히 떠나야 했다. 그런 다음 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난징(南京, 1937)•창사(長沙,1937)•광저우(廣州,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을 차례로 거쳐 1940년 마침내 충칭에 이르렀고 여기서 일제의 패망을 맞았다.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강서•호남•광동•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간 만리장정에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행각을 만리장정이라 부르기도 했다.”(<장강> p.168) 그 피난길은 한편으로는 굶주림과 위험에 가득찬 고난의 행렬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임정의 비타협적 투쟁성을 만방에 과시한 영광의 행군이기도 했다. 김자동의 가족은 부친 김의한의 중국관청 취직(1934~37)으로 임정 본부와 동행하지 못한 시기도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임정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며 고락을 함께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은 늘 한결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장강일기』와『상하이 일기』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그 점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주목하고, 해방후 독립국가 건설과정에서 왜 임정이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각도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독립운동단체들의 끝없는 분열상이었다. 일찍이 상해임정에 잠깐 참여했다가 일제에 순응하여 귀국한 춘원 이광수는 유명한 논문「민족개조론」(1922)에서 “그들의 명망의 유일한 기초는 떠드는 것과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과 해외에 표박하는 것인 듯하다”고 한때 자신도 속했던 망명지의 독립지사들을 비방한 바 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이 비방이 아주 근거 없는 것만도 아니라는 안타까움을 절감하게 된다.

  항일투쟁의 대열에 섰던 사람은 보수주의든 사회주의든, 혹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녔든 간에 동시에 다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들 사회주의자와 한국 광복 진선(光復陣線)이 주도하던 당시의 임정 정부는 늘 대립되어 쉽게 단결할 수 없었다.

  남경의 항일 민족운동가들은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서 이러한 대립을 줄이고, 가능한 한 함께 뭉쳐야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시도가 늘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먼저 있던 단체의 간판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늘 생겨나서 결국 두 파가 합쳐 하나가 되는 대신 오히려 하나가 더 늘어나는 결과가 종종 있었다.(<장강> p.126)

  한편, 상해임정이 태동할 무렵 만주(동북 3성)에서는 홍범도•김좌진•최진동 등 독립지사들의 무장투쟁이 일제에 타격을 주고 활기를 띠었으나, 일제 관동군의 작전이 본격화하고 만주 괴뢰국이 세워지면서 “결국 지도자 대부분은 중국 관내(산해관 남쪽)로 이동했으며, 1933년 말에 이르러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은 거의 일단락지게 된다.”(<상하이> p.67) 이런 절망적 상황을 배경으로 김일성이 이끄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무장부대가 등장하는 것이다. “국민당과 만주군벌이 철수하고 한인 무장투쟁 지도자들이 떠난 후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된 것이다.”(같은 곳) 일제패망 이후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국가 수립이 성공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항일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이러한 이념적•정파적 자기분열에 기원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반도 남북의 정권 모두가 자신들의 국호에 규정된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독립투쟁과정 자체가 처했던 악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쑨원(孫文)이나 호치민(胡志明) 같은 통찰력과 포용성을 겸비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은 불행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임정과 김자동 가족이 일제의 무조건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충칭에서였다. 임정 주석 김구 선생은 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에 시찰을 나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라는 그의 언급은 유명한 일화거니와, 내 힘으로 얻지 못한 해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그는 예감했던 것이다. 얼마후 김자동은 충칭의 한 극장에서 미군이 서울로 진주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영화를 보았다.

  시청에서 중앙청까지 미군이 행진하는 것을 보면서, 어릴 때 잠깐 들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 서울이 제법 잘 정리된 현대적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군중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일장기를 내리는 장면에 군중은 더욱 환호했으며 나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 그러나 올라가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상하이> p.264)

  임정요인들의 귀국은 쉽지 않았다. 10월이 되어서야 항공편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통보가 왔고 그나마도 개인자격으로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의 귀국은 더욱 어려웠다. 1946년 1월 16일 마침내 정정화•김자동을 비롯한 백여 명 가족들은 6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충칭을 출발했다. 미군 수송함 엘에스티(LST)에 올라타고 상하이를 떠난 것은 다시 넉 달 가까이 지난 5월 9일이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였으나, 배 위에서 사흘을 더 보내야 했다. 그리고 5월 15일 오후 부산역을 출발한 기차는 이틀 뒤인 17일 저녁 8시쯤에 경성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수십년의 풍찬노숙 끝에 돌아온 임정 가족들을 맞이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다음은 서울행 기차 안에서의 일이다.

  또하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기차가 설 적마다 화물간으로 기어올라와 설쳐대는 경찰관들이었다. 아무에게나 반말 짓거리로 대하고 위세를 부리는 꼴이 꼭 왜정 때의 경찰을 그대로 뽑아다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장강> p.268)

  그러나 이것은 약과였다. 충칭시절 가깝게 지낸 박종길이란 분은 일제 징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대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이 경북 영양인데, 귀국 후 고향에 내려가 보니 지난날 왜놈 앞잡이들이 그대로 공무원이나 독립촉성회 회원으로 앉아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박종길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대구를 중심으로 10월항쟁이 일어나자 박종길은 빨갱이로 몰려 서울로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된다.(<상하이>p.267, 318) 그러나 실은 이것도 약과다. 항일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 백범은 흉탄에 가고 암살자 안두희는 얼마후 대로를 활보하지 않았던가.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4•3항쟁이 일어나 30만 도민 가운데 10분지 1이 희생되지 않았던가. 또한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은 무고한 백성 수십만(어쩌면 백여만)을 재판 없이 학살하지 않았던가.

  이 광기의 회오리는 정정화를 피해가지 않았다. 상하이 유학생이면서 동아일보 특파원을 겸하고 있던 우승규(禹昇奎, 필명 나절로)”(<상하이> p.43)가 신문에 그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찬양했던 것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1951년 9월 신원이 불확실한 어떤 여자가 정정화를 찾아왔는데, 그 여자를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부역죄로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조사는 계속되었고, 조사과정에서 내게 손찌검을 하는 자도 있었다. 일정 때부터 같은 일에 종사해온 자임에 틀림없었다. 해방된 지 6년이 지난 당시에도 일본경찰 출신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심지어 경찰 고위간부직까지도 부일협력자가 자리에 턱 버티고 앉아 있는 형편이었다.(<장강> p.313)

  결국 정정화는 ‘비상사태 하의 특별조치령’에 의해 기소되고 재판에 넘겨졌다. 20명의 피고가 한꺼번에 재판정에 서는 재판으로서, 각기 죄명이 달랐으나 검사는 개인적 구별 없이 ‘이 사람들은…’으로 시작되는 일괄적 논고를 했다.(<장강> p.314) 변호사를 댄 사람은 정정화 하나뿐이었으므로, 간단하나마 그에게는 별도의 기소가 있었다. 그 변호사가 후일 유신정권에 항거했던 이병린(李丙燐)이었다. 변호사가 딸린 덕인지 정정화는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낯선 대륙에서 수십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노고를 아끼지 않은 데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보답은 너무나 허망한 것이었다. 남편 김의한은 전쟁 초기에 북으로 납치되고, 이제 그에게는 침묵과 체념의 여생 40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염무웅(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 201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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