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이스트우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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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1-12 12:34 조회21,0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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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둔 지난 8월 30일, 공화당 전당대회장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했다. 이 당대의 배우이자 감독은 뒤에 '빈 의자 퍼포먼스'로 불린 즉흥극을 벌여 오바마를 조롱했고, 롬니 공화당 대통령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국의 언론에도 널리 소개된 이날 이스트우드의 정치 퍼포먼스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그의 영화를 사랑해 온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보수파 아닌 완고한 개인주의자
이스트우드의 오랜 팬인 나에게도 그의 돌출 행동은 약간 뜻밖이었다. 민주당 지지자가 다수인 할리우드에서 그가 드문 친공화당 인사이긴 했지만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스트우드가 연출했으며 배우로서는 마지막 출연작이라고 선언한 '그랜 토리노'(2008)에 담긴 미묘한 태도 변화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퇴역군인 코왈스키는 사악함과 무례함이 지배하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만을 믿으며 외롭게 살아가는 완고한 노인이며 이스트우드의 분신이다. 그의 영화들과 서부극 전반에서 이런 캐릭터는 전형적이다. 사내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세상과 부딪히고 결국 자기만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걸작 서부극 '수색자'(1956)의 이산이나 이스트우드의 대표작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의 마니는 코왈스키의 영화적 선배다.
'그랜 토리노'의 다른 점은 주인공이 죽음을 택하고 자신의 자리(이 영화에선 그랜 토리노라는 차로 상징되는)를 아시아계 소년에게 물려준다는 점이다. 배우 은퇴를 선언한 영화에서 자신의 배역을 더 이상 지상에 남겨두지 않는, 그리고 그의 자리를 소수자 중의 소수자에게 이양하는 이 영화적 선택은 오랜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가 조지 부시를 비판한 현실의 선택과 맞물려,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예감되었다. 말하자면 공화당과의 결별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우회적 응원, 더 중요하게는 현실 정치와의 작별 인사로 느껴진 것이다.
나는 그가 남은 삶의 시간 동안 현실정치가 관여할 수 없는 근본적 의제에 몰두하기를 기대했고 예감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틀렸고 과잉해석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오바마가 "나는 여전히 이스트우드의 골수팬"이라고 시원스레 받아넘겼듯, 그의 영화에 대한 우리의 애호가 변하진 않을 것이다.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하나는 이스트우드가 실은 보수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리버테리언(libertarian)이다. 자유의지론자로 번역되는 리버테리언은 '경제적 이슈에선 보수적이지만, 개인적 자유에선 진보적'이며, 따라서 보수와 진보 혹은 중도파라는 개념에도 포섭되지 않는다. 건국 초기 미국의 자경단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는 자유의지론자는 완고한 개인주의자이자 절대적 자유주의자이며 오히려 무정부주의와 친연성이 있다.
스스로 진보적 혹은 보수적이라고 믿는 한국인 중 상당수도 자유의지론자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요점은 현실정치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며, 한 개인의 당파적 선택은 그의 정치성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진중권도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나는 차라리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한 바 있다. 정당이나 대통령에 대한 동일시의 환상이 결국 무너지는 것은 종종 그들의 실정 때문이라기보다 이 간극 때문이다. 이 간극에 대한 인지가 우리를 맹목적 열광이 아닌 냉정한 선택으로 이끌 것이다.
예술가의 당파적 선택이 우월적 기준 되진 않아
두 번째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해도 그의 당파적 선택이 우월적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종종 현실 정치가 개입할 수 없는 근원적 의제를 탐구한다. 현실 정치에서 당파적 선택은 현실타당성이란 판단을 경유하는데, 이 점에서 훌륭한 예술가가 범인들보다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최근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논란이 일었지만, 아무리 그의 작품을 경외한다 해도 그의 당파적 판단을 내년에 스무 살이 되는 내 딸의 당파적 판단보다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요점은 투표의 정당한 기준은 선악이나 대의, 혹은 삶의 근원적 의제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의 표현이며 계급적 선택이다. 자신의 실제적 의제에 충실할 일이다. 어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
허문영 영화평론가
(부산일보, 2012. 11. 12. ; 매일신문 201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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