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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단돈 천원과 윤리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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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2-07 13:07 조회21,5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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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하기가 참 쉬워진 세상이다. 올해 등장한 디지털 자선냄비에는 카드 단말기가 달려서 신용카드뿐 아니라 교통카드로도 한번 접촉에 2000원씩 기부가 가능하다고 한다. 시청자의 전화 한 통이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방송도 오래된 일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책 한 권을 사면 얼마씩 기업이 나 대신 기부를 해준다고도 한다. 이때 단골로 등장하는 기부 대상이 기아와 전염병에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인데, 단돈 1000원이면 열흘치 분유를 살 수도 있고 탈수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기부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없어도 표 안 나는 단돈 얼마로 남을 돕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니다. 병원 영안실 웹사이트에서 카드로 조의금을 결제할 수 있는 세상인데, 적은 돈을 쉽게 기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디어들이 뭐가 문제겠는가. 게다가 작은 도움을 받아 삶의 의지를 찾았다는 사연들을 들으면 뭉클해지는 것도 사실이고, 당장의 욕구나 욕망 충족을 넘어서 윤리적 소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구나 잊고 있어도 매달 통장에서 적든 많든 일정한 후원금을 꾸준히 이체하여 보내주는 자금관리서비스(CMS, 은행자동이체)가 없었더라면 많은 민간·사회단체들이 현 정권 아래서 이만큼 버텨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돈 따라 마음도 간다기에 그런 줄로 믿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마음이 전혀 없는데 기부를 하고 후원을 하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살다 보니 돈 따라 마음이 가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주고 잊어버리기 위해서 쓰는 돈도 많더라는 것이다. 사실 자선이나 기부는 제대로 잘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를 어떻게 왜 도울지, 돈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어느 하나 쉬운 부분이 없다. 심지어는 국가가 복지를 할 때에도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이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헛돈 쓴다는 비난을 받으니, 물론 언제나 돈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돈으로만 해결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알려진 배우들이 다투어 아프리카 어린이를 지원하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빌 게이츠 재단이 나이지리아 환자들에게 의료 원조를 한다고 칭송받지만,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가 투자하고 있는 공해산업들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입지 않는 헌 옷을 아프리카에 보내는 것이 아름다운 일로 되어 있지만, 바로 이 헌 옷들이 세계 최대의 면화 재배지인 아프리카의 의류산업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아프리카를 원조 대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우리가 제3세계에 대해 가진 편견과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돈으로만 안 되는 것은 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의 노인 빈곤 문제가 따스한 마음으로 모아 보내는 돈 몇 푼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단돈 얼마라는 말과 윤리적 삶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다. 내 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고, 중요한 것을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 윤리적인 삶이 가능할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 돈이 있어야 가능한 소비자라는 위치, 그리고 지구적인 불평등과 착취 관계를 그대로 놔둔 채 착한 삶과 착한 소비는 불가능하다. 윤리란 결국 내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타인의 곤경을 보고 그야말로 단돈 얼마라도 내놓는 마음은 소중한 출발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한겨레, 20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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