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재난현장에서 울리는 영혼의 소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3-29 13:56 조회18,34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위험사회에서 살아가기 | ||||||||||||
몇 해째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는 가운데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했고 이어서 유엔의 제재결의가 있었다. 이후 남북의 군사당국자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군사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다들 설마 하는 심정으로 태연한 척 지내지만, 가슴 한구석에 어른거리는 불안의 그림자는 감추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생존의 미래를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은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말고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기후•식량•에너지•질병•환경오염 등 수많은 요인들 가운데 어느 것이 어떻게 돌변해서 우리에게 치명적 공격을 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 여러 요인들이 지구 전체를 무대로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거대한 ‘복잡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부의 운동양상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인간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다. 위험에 대처하는 노력의 과정에도 당연히 많은 함정들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지구 도처에 만연한 대소 규모의 전쟁과 각종 테러는 이미 현존하는 위험이고, 독재와 선동정치 즉 파시즘의 발호도 상시적인 경계대상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이런 사태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정치적•도덕적•역사적 감각이 마비되는 일이다. 한 개인으로서나 인류 전체로서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우리의 사건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가지면서 오늘 내가 읽고 소개하려는 책은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irady)의『운명의 날』(강경이 옮김, 에코의서재 2009)과 사사키 다카시(左々木 孝) 교수의『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형진의 옮김, 돌베개 2013)이다.(이하 전자는『운명』, 후자는『원전』으로 약칭한다.) 이 책들은 둘다 한 시대를 놀라게 한 대지진을 화제의 출발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없지도 않다. 즉, 전자는 1755년 11월 1일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다루고 있고, 후자는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대지진 이후 재난을 견디고 있는 현재상황이 다루어진다. 그런데 그동안 지진•홍수•대화재•화산폭발 등 역사책에 오를 만한 수많은 재난들 가운데 왜 하필 두 경우만 문제인가 물어볼 수 있다. 더구나 리스본 대지진은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고 우리와는 무관한 사건 아닌가. 물론 그런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제대로 수습하는 데 앞으로 40년이나 걸린다는 현재진행형 사건인데다 바로 이웃나라의 일이라 우리 자신의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리스본 대지진도 오래전 있었던 먼 나라의 사건이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암시를 줄 수 있다는 것이『운명』을 읽은 내 감상이다. 물론 두 지진은 아주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하여 다른 결과를 낳고 있을 뿐더러 사건에 접근하는 저자들의 입장도 전혀 상반되기 때문에『운명』과『원전』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자. 『운명』의 저자는 미국 출판계에서 ‘건축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글’을 쓰는 건축비평가이자 역사저술가로서, 이 책의 주제는 앞서도 말했듯이 리스본 대지진이다. 그는 리스본 대지진을 유럽 근대화과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고 그 의미를 천착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본격적인 역사학자도 아니고 전문적인 지진학자도 아니며, 이 책은 학술적인 저술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당대 유럽사상계의 갈등과 변화라는 큰 틀에서 포르투갈 현실을 들여다보고, 동시에 편지•일기•신문기사 등 참사 당시의 생생한 기록들을 적절히 참조함으로써 리스본 대지진이라는 렌즈를 통해 18세기 유럽사를 보는 원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원전』의 저자는 스페인 문학과 사상사를 전공한 교수로서 몇몇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거나 비교문화 등을 강의하다가 2002년 정년이 되기 전에 퇴직하여 고향인 후쿠시마현(福島縣) 미나미소마시(南相馬市)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노디아로고스>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블로그를 만들어, 여기에 일기 쓰듯 그날그날의 생활과 사색을 기록해나간다.(‘모노디아로고스’는 사사키 교수가 즐겨 인용하는 스페인 사상가 우노무노가 만든 조어인데, ‘독백’과 ‘대화’의 합성어.) 이 블로그는 사사키 교수의 말대로 “지진 전까지는 하루 평균 150건 정도의 접속이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였는데, 대지진을 계기로 요즘처럼 많을 때는 하루 5,000건 가까이 접속이 있는 광장의 게시판 같은 블로그가 되었다.”(『원전』p.43) 말하자면 그의 블로그는 재난현장의 목소리로서 일본 전국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 책은 대지진 전날인 3월 10일부터 이듬해(즉 2012년) 12월 3일까지 사사키 교수가 블로그에 썼던 글들 중에서 내용과 부피를 감안하여 한 권의 책이 될 만하게 뽑아 묶은 것이다. 그런데 지진 발생 직후 일주일 동안은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 글 쓸 엄두가 안 났고 2011년 7월 중순이 되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역시 기록이 줄어든다.(原書는 일본 론소샤에서 2011년 출판되었으며, 2011.7.14~2012.12.3 부분은 한국어 번역판을 내면서 추가한 것이다.) 지진과 18세기 포르투갈 사회 역사적 지진의 날로부터 꼭 250주년 되는 2005년 11월 1일,『운명』의 저자 니콜라스 시라디는 리스본에 머물고 있었다. 만성절(萬聖節)인 이날 아침도 리스본은 250년 전의 그날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했다. 마침 월요일이어서 많은 시민들은 연휴를 즐기기 위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시내는 조용했다. 지진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9시 30분 정각, 리스본 전역의 모든 교회들은 일제히 종을 울렸다. 대재앙을 기억하는 종이자 재앙으로부터의 부활을 기념하는 종이었다. 같은 날 국제지진학 학회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모여 지진학 관련 발표를 했고 국립고대미술관에서는 재앙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모든 포르투갈 언론들이 이에 관한 특집을 마련하고 다큐멘타리를 방영했다. 과연 리스본 대지진은 이렇게 세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역사적 사건인가.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한 리스본 지진만큼 거대한 자연재해가 유럽을 덮친 적은 없었다.”(『운명』p.245) 더 규모가 큰 지진은 물론 있었지만, 문명사회의 핵심부를 강타한 지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더불어 식민지 개척의 선두주자였으므로, 당시 리스본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번창하는 수도이고 암스테르담과 런던에 버금가는 활기찬 항구일뿐더러 “브라질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산재된 식민지를 거느린 포르투갈 제국의 정신적•행정적 중추”(『운명』p.59)였다. 유럽 주요국가의 상인과 무역업자들도 다수 리스본에 머물고 있었고 리스본에 땅과 건물을 소유한 외국인도 많았다. 다음의 서술에서 보듯 리스본은 이미 국제적인 도시였다.
포르투갈 왕실이 당시 유럽 주요 국가들의 왕실과 혼맥으로 이어져 있던 점까지 가세하여 지진피해의 국제적 성격은 재난에 대한 국제적 구호사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입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재난을 통해 포르투갈 사회의 모순과 유럽 사상계의 이념적 분열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종교적 독단과 계몽주의적 독재 당시 유럽 주요국가에서는 한창 계몽주의가 꽃피고 있었다. 홉스(1588~1679)•데카르트 (1596~1650)•로크 (1632~1704)•뉴턴(1643~1727)•몽테스키외(1689~1755) 같은 지진 이전 세대와 볼테르(1694~1778)•루쏘(1712~1778)•디드로(1713~1784)•칸트(1724~1804) 같은 지진 세대의 이름만 열거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이베리아반도는 가톨릭 사제들이 지배하는 엄격한 신앙의 요새로서 독단적 교리에 묶여 있었다. 성직자 자신들은 리스본을 ‘악의 소굴이라고 질타했지만, 성당과 수도원의 수만 놓고 본다면 당시 리스본만큼 신성한 도시도 없을 것이었다.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가 수도사이고 포르투갈 전체 인구 3,000만 가운데 20만 명이 성직자였다고 하니(『운명』p.19), 가히 종교국가라고 할 만했다. 이 신정(神政)체제의 유지를 위해 1536년 종교재판소가 도입되었는데, 지진 발생시까지 백여 년 동안 2,000명 가까이 처형되고 수천 명이 고문받거나 추방되었다. 대학에서는 중세신학연구•교회법•사법•의학으로 교육과정이 축소되고 수학•철학•논리학•자연과학 강의는 폐지되었다.(『운명』p.118) 리스본 대지진은 바로 이러한 중세적 질서에 대한 타격이었다. 지진에 의한 파괴가 얼마나 엄청나고 끔찍했는지 한 영국인 생존자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한때 리스본이었던, 그러나 더 이상 리스본이 아닌 곳에서.”(『운명』p.79) 폐허의 현장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지는 지진의 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더 박진감 넘치는 실감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앙을 통해 사회적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시적인 착시(錯視)일 뿐이었다. 포르투갈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신부들은 지진이 일어난 순간부터 그것이 하느님의 징벌이라 설교하며 회개하라고 외쳤고, 하느님의 분노가 다시 리스본을 때리기 전에 저주받은 도시를 떠나라고 권유했다. 사제들 중에서도 가장 맹렬하게 활동한 사람은 가브리엘 말라그리다(Gabriel Malagrida) 신부였는데, 선동적 문체로 쓰여진 그의 소책자「지진의 진정한 원인」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리스본 지진에 대한 고찰」이란 소책자에서 지진에 충격받은 영국인들에게 종말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재앙에 대해 이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폼발 후작(Marquês de Pombal)이란 작위명으로 더 알려진 총리대신 카르발류(Sebãstiao José de Carvalho e Melo, 1699~1782)였다. 정치에는 흥미를 못 갖고 사냥, 승마, 음악회 따위에 파묻혀 지내던 국왕 주제 1세(Jose 1, 재위 1750~1777)가 당황해서 “하느님께서 내리신 이 형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카르발류는 즉각 “죽은 자들은 묻고 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운명』p.34) 국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카르발류는 신속하고 대담하게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강력하게 개혁을 밀고나갔다. 그는 근대적 재난관리 시스템을 만들었고, 재능있는 건축공학자들을 발탁하여 리스본을 평등주의 이념이 깃든 계회도시로 재건했으며, 정교분리•귀족견제•노예제 철폐•군대개혁•상업육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교육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을 강행하기 위해 그는 권력남용을 서슴지 않았다. 예수회를 추방하고 정적을 처형하는 등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했던 것이다. “유럽은 포르투갈을 통해 후일 벌어질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를 미리 맛본 셈”이었다(『운명』p.216)는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 재난 속에서 농성생활 유럽의 18세기가 계몽주의 시대라곤 하지만 현실의 심층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종교권력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에서는 수구와 개혁 간의 모순이 더 극단적인 양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전체에서나 포르투갈 한 나라에서나 봉건적 중세로부터 근대 계몽주의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역사적 지표였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미증유의 재난을 둘러싸고 말라그리다 신부가 대표하는 가톨릭교회와 카르발류가 이끄는 개혁세력 간에 대립은 치열했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그것은 권력투쟁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 카르발류 같은 정치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라그리다 같은 신부도 목표는 세속적 지배권의 장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폐허를 경험한 자의 영혼의 소리는 울려나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사사키 교수의『원전』은 소박하고 나지막한 심경고백에 불과한 글이면서도 쉽게 듣기 어려운 깊은 울림을 발하고 있다. 이 책은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일기 적듯이 개인 블로그에 적어나간 그날그날의 단상(斷想)을 모은 것이므로, 표면상 소소한 일상의 기록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저자와 한 집에서 불편한 생활을 같이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의 소탈한 인품에 때로는 눈물이 핑 도는 듯한 감화를 받았으며, 생활의 묘사 가운데 가끔 섞여 나오는 통쾌한 유머와 깊은 통찰에 문득 무릎을 치고 경탄하며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대지진과 원전사고 이후 이에 관련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 상당수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다. 물론 원전과 방사능 문제에 대해서는 양식 있는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조사와 본격적인 대응이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옳게 해결하기 위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언론계와 시민사회, 학자와 전문가들의 협동작업도 필수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원전』을 읽고서 절실하게 확인한 사실은 사사키 교수처럼 아무런 전문지식도 없고 뛰어난 지도력도 없는 인문학자의 소박한 고향사랑, 애틋한 가족사랑 같은 부드러운 감수성이야말로 원전사고와 같은 중대 문제를 대처하는 데도 무엇보다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지진에 뒤이어 원전폭발이 일어났을 때 사사키 교수는 98세의 노모, 치매에 걸린 아내, 아들 부부, 그리고 두 살짜리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사고가 나자 일본 정부는 폭발지점을 중심으로 20㎞ 권역, 30㎞ 권역을 각각 옥내 대피지역, 자발적 대피지역으로 지정하여 주민들에게 피난을 지시했다. 하지만 사사키 교수는 정부의 안이한 조치에 분노하면서 피폭이 두려워 도망가기보다 가족과 함께 남는 쪽을 택한다. 해안선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그의 집은 지진해일로 인한 피해는 면했고, 전기와 수도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장 큰일은 없었던 것이다. 사고가 나고서 보름쯤 뒤에 먼 곳에 사는 가톨릭 신부인 형이 데리러 왔으나, 노모와 아들 가족만 딸려 보내고 그는 아내와 둘만 남는다.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 못하는 치매의 아내를 돌보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난 마을에서 ‘농성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집은 사고원전에서 25km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왜 그는 불안과 불편을 감수하면서 집에 남았는가. 그의 농성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초기에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아주 소박한 이유를 들었다. 평소에도 그는 정치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게다가 예전부터 매사에 늑장이었으므로, 이런 자신의 체질상 피난권유에도 늦게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의 지시와 언론의 호들갑에 사람들이 부화뇌동하는 데 대한 반감과 분노가 점점 커지게 되는데,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정부는 ‘옥내 대피지역’을 지정해놓고 시내병원과 노인시설을 30㎞ 권역 밖으로 이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동과정에서 의료진과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내돌려지다가 사망한 노인만 사고 직후 1주일 사이 40~50명이나 되었다. 그렇다면 원전폭발로 인한 방사능보다 이동과정의 부담이 노인에게는 더 위험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인데, 정부와 지자체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해명도 없이 정해진 규정의 준수만 되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부를 향해 묻는다. “이건 명백한 과실치사에 해당하는 범죄 아닌가?”(『원전』p.27) 내면으로 전진하라! 요컨대 사사키 교수는 정치가와 정부관리들, 도쿄전력이나 일본우정국 같은 공적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관료적 사고와 행정편의주의적 관행에 철두철미 저항적이다. 원전사고 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그들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통해 그의 사유는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그는 국가(state)와 국민국가(nation)와 나라(country)를 구별하여 추상적 레벨의 법적 개념인 ‘국가’와 달리 “나를 길러준 대지, 바다, 그리고 내 안에 흐르는 조상의 피를 표현하는 말이 ‘나라’라고” 말한다.(『원전』p.67) 물론 이것은 엄밀한 학술적 규정이 아니라 사사키 교수 나름의 인문학적 설명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그가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고 후 많은 주민들이 떠난 뒤 그는 남아 있는 친구, 다시 돌아온 동네병원 의사, 정육점과 채소가게 주인, 산책하다 만난 아주머니와 어린이들에게 깊은 정서적 일체감을 느낀다. 그가 그들과 맺어가는 인간관계의 친밀성은 오늘의 대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는 말한다. “분명한 것은 인간끼리 각자 전혀 다른 별개의 인격과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즉 인간존재의 원비극(原悲劇)이라고 해야 할 슬픔을 토대로 한 연대감이라고 생각한다.”(『원전』p.99) 다만 그는 지금 일본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눈물빼기식 센티멘털리즘’에는 동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사키 교수의 삶에서 시종일관 견지되는 이 자유의지의 태도를 그는 좋아하는 스페인 사상가 우나무노의 말을 빌어 “내면으로 전진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내면으로의 전진이 가장 치열하게 수행되는 현장은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하루하루를 사는 일이다. 다음은 어느 날의 기록 일부이다.
웬만한 사람, 가령 나 같은 사람이라면 이 고행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사키 교수는 “장애를 가진 아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이상한 용기와 안정감을 늘 받고 있다”고 말한다.(『원전』p.48) 다시 말하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영혼의 중심(重心)’이라는 개념을 창안하는데, 병든 아내가 곁에 있음으로써 그 고통의 무게중심 때문에 자신이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병 자체는 고약한 것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심을 잡아주는 것, 사안의 옳고 그름•경중•적합한지 부적합한지를 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원전』p.116)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사사키 교수의 사색 중에는 이 밖에도 귀 기울일 만한 지혜의 말씀이 허다하게 많은데, 이쯤 되면 지진이야말로 “참된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원전』p.243)라는 그의 언명이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 |
염무웅(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3. 3. 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