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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사이코패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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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4-01 15:21 조회18,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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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여중생 납치 살인 사건과 관련해서 등장한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는 이제 드라마와 영화, 언론에서 넘쳐나는 중이다. 이후 흉악 범죄가 반복될 때마다 범인들은 당연히 사이코패스라 간주되며,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양심이나 공감의 능력을 결여한 존재, 그리하여 안온해야 할 일상을 가차없이 파괴하는 존재들을 가리켜 우리들은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곳곳에 숨은 사이코패스로부터 위협받는 일상을 걱정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이코패스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이기적이며, 대단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하고, “거짓말에 매우 능하고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계산적인 행동과 표정과 말투로 사회에서 능숙히 섞여 지내고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 범죄를 저질렀을 때만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계나 업계의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니, 그래 맞아, 그런 사람들 많이 봤지, 이런 사람들을 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니 사이코패스가 그렇게 흔했구나 싶었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도 하고, 날 때부터 남다른 사이코패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세계 곳곳에서 나날이 흉포해지는 범죄의 양상은 개인의 인격 장애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사실 우리가 사이코패스를 끔찍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고통과 두려움에 질린 피해자들을 보면서도 일말의 가책이나 주저함 없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비단 살인이나 성폭행만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사는 사회는 다른 대책이 없는 줄 알면서도 한겨울에 전기를 끊어서 화재로 죽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여기 아니면 다른 데서는 치료받을 곳이 없다는 호소를 외면하면서 공공병원의 문을 닫아 환자를 거리로 내모는 세상이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몇배라는 노인들의 자살을 보면서도, 혹은 작업장에서 죽을병을 얻은 노동자들이나 길어지는 농성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면서도, 당장 나의 일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으니, 타인을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직접적으로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도 효율성이나 시장의 논리로 정당화되고, 사회와 집단의 이름 속에서 숨을 수 있다면 딱히 내 책임은 아닌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면 타인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살필 여력은 더 줄어들고 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경제 위기로 곤경을 겪고 있는 스페인에서 얼마 전 지역의 자물쇠업자 조직이 어린아이나 노인, 환자가 있는 집에서 자물쇠를 바꿔 달아 거주자들을 거리로 쫓아내라는 정부의 주문을 거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 울림이 컸다. 부채로 인한 퇴거명령이 급증하여 그간 제법 쏠쏠한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타격은 좀 있겠지만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데서 연대를 생각하는 사회적 저력과 그들의 직업적인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래, 당장 내가 죽을 지경도 아니라면 안 할 일은 안 할 수 있어야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당장 지자체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가 뒤집어지는 것도 아닌데 댓바람에 공공병원부터 닫아거는 사회가 더 부끄러워졌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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