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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성장’에 대한 신앙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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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28 15:19 조회24,8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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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로 나선 세 사람의 공약을 들여다보면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복지,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은 어느 후보나 입만 열면 하는 말이다. 선거철이면 항상 그랬듯이 경제성장이 다시 공약의 중심이 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도 세 사람 모두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일자리 창출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솔깃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셋 중에서 안철수 후보만 그런대로 참신한 구상을 내놓았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이 동력은 창의력이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는 여건에서 이루어지는 기술혁신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체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의 돌파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평가해줄 만하다.

 그러나 안철수의 혁신경제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 현재의 지구 상황에 비추어볼 때 아무리 혁신기술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성장의 시대는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금 자원 부족과 기후변화에 시달리고 있다. 석유 생산은 2005년 이래 거의 늘어나지 않았지만,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결과는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나타났고, 세계경제를 침체의 늪에 빠뜨렸다. 석유만 부족한 게 아니다. 각종 혁신적 기술에 필수적인 희토류 금속들도 급격한 수요 증가로 고갈되고 있다. 기후변화도 계속 심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40%나 증가했다. 석유 생산량은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석유가격이 크게 오르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5년쯤에는 배럴당 200달러 선을 넘어설 것이고, 전 세계는 다시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성장만을 좇던 한국은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 후보의 행보로 미루어보면 이러한 지구적 여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상황에 대해 무지하든지, 그러한 고려가 당선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되든 대통령 당선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복지,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지구적 현실 앞에서 어떻게 그걸 이룩하느냐이다. 혁신경제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성장만이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고, 복지를 가능하게 하고, 행복을 선사한다는 낡은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방향을 180도 바꾸어 성장을 너무 신봉했기 때문에 전 지구적인 자원 부족과 기후변화가 초래되었고, 이로 인해 경제위기가 왔고, 빈부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고,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성장이 아니라 탈성장 또는 역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탈성장 속에서도 복지와 일자리 창출은 가능하다. 전통적인 경제의 시각에서 볼 때 일자리 창출은 생산과 소비를 늘리고, 석유와 자원의 소비를 증가시키며, 기후변화와 자원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탈성장 사회에서는 일자리 창출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증가 없이 일자리를 늘리고,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복지의 증진 또한 파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정신을 고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일자리와 복지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생활양식과 문화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소비사회의 확장 외에 대안이 없다고 보는 재벌 등은 이러한 변화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이런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 후보가 위와 같은 이야기를 입 밖에 내놓는 순간 그의 낙선은 확정된다. 그래도 그런 후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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