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국제영화제와 국제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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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15 12:43 조회22,1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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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종종 듣는 답답한 질문 한 가지가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 몇 대 영화제에 속하는가?” 그냥 몇 등이냐는 소리다. 이것은 한국 자동차 산업이 세계 몇 위냐는 질문보다는 김치가 세계 음식 중에서 몇 등이냐는 질문에 가깝다. 후자가 대답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의 평가에서 양적인 기준이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준비된 대답은 이렇다. ‘비경쟁(중심)영화제로는 상영작 편수와 관객수를 기준으로 할 때 로테르담, 토론토 영화제와 함께 3대 영화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는 경쟁(중심)영화제이므로 직접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칸 영화제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느냐는 잘못된 질문이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가는 영화제’라는 표현도 엉뚱한 소리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를 포함해 새로운 아시아 영화를 소개하는 쇼케이스 역할을 충실히 해왔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세계적, 글로벌이라는 수사는 종종 개별성, 지역성을 전지구적 서열의 하위 개념으로 밀어내거나 망각한다.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세계적 서열이 매겨질 때만 관심을 갖는(그래서 올림픽 증후군이라고 부르고 싶은) 집단 심리와 이 글로벌 집착증 사이에는 혈연이 있는 것 같다.
싸이가 자신을 월드 스타 대신 국제 가수로 불러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언어 감각에 매료되었다. 월드 스타와 국제 가수. 두 말의 차이를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영어와 한국어라는 차이. 싸이가 미국의 TV에 처음 출연해 “이런 자리에 나와서 꼭 한국어로 말해보고 싶었어요. 죽이지?”라고 말하는 걸 보고 누군가는 영어를 잘 하는 싸이의 애국심 운운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싸이는 지금 놀고 있다. 노는 사람이 싫어하는 건 경직과 엄숙이며, 좋아하는 건 경직과 엄숙을 유희하는 것이다. 세련된 매너와 유창한 영어가 기대되는 ‘글로벌’한 자리에서, “죽이지?”라는, 한국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나 사용될 법한, 그리고 통역 불가능한 말이 튀어나왔을 때, 난감한 표정의 미국인 사회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막 출세길에 접어든 촌놈 하나를 데리고 와 대우해줬더니 이 친구가 감읍하기는커녕 고향 친구들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싸이는 그들의 난처함을 즐기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경계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국가적 경계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이라는 사회 문화적 경계다. 싸이는 지금 중심과 주변이라는 사회 문화적 경계의 경직성을 유희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 스타와 국제 가수의 또다른 차이는 ‘월드(혹은 글로벌)’와 ‘국제(international)’의 의미 차이다. 전자에는 지역성이 제거되어 있고, 후자에는 지역성에 바탕한 교류와 교감이 포함되어 있다. 두 단어에 복잡한 정치`경제학적 논의를 개입시키는 것은 지나친 호들갑일테지만, 나는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용법을 의심하며, 후자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마지막 차이는 후자에는 전자에 없는 개별적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 라고 싸이는 말하려 한다. 그런데 왜 뮤지션이나 아티스트가 아닌 가수일까. 짐작컨대 싸이는 앞서 말한 의미의 차이들을 특별히 의식하진 않는 것 같다. 그는 ‘국제 가수’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국제 가수’는 어쩐지 ‘동남아에서 막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으로 시작되는 지난 시절의 허풍스런 호객의 언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요컨대 싸이는 지금 스스로를 놀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는 ‘강남스타일’의 뮤직 비디오 콘셉트가 “한심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아 세상의 경직과 엄숙을 유희할 것. 싸이는 멋진 광대다. 그를 보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월드’ 시스템의 중심에 진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스템 안에서도 한심한 광대짓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꼭 한마디 적어두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방면에서라면 유세윤(UV)의 ‘이태원 프리덤’이 한 수 위라는 것이다. 더 기발하고 더 한심하며 더 유희적인 이 작품은 내가 보기엔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신명나고 가장 파격적인 광대짓이다. 그가 국제 가수가 아니라는 점은 부차적이다.
요점은 간단하다. 국제영화제든 국제 가수든 잘 해왔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고 격려할 것. 세계 서열은 그 다음 문제거나 문제가 아니다.
허문영/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
(매일신문·부산일보,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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