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서]중국과 만나는 근원적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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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1-12 15:57 조회21,0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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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베이징에서 개막한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중국 권력교체의 윤곽을 드러낼 예정이라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 의미와 전망에 대한 의견들이 언론매체마다 무성하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지난 3-4일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이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회의 “동아시아 문화 속의 중국”에 참석한 세 사람의 발표에 더 관심이 끌린다. 그를 통해 우리가 중국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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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연구포럼, <동아시아 문화 속의 중국>
먼저 영국 출신의 비커스(Edward Vickers) 교수의 발표가 주목된다. 그가 참석한 회의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동아시아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참석을 허용하되 반드시 동아시아 언어로 참여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의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가 이번에 영어가 아닌 서툰 일본어로 발표하느라 고생을 했다. 나는 종합토론 사회를 보면서 그가 일본어로 논의한 것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가 익숙한 (헤게모니적 언어인) 영어 대신 힘들지만 일본어로 발표하고 또 그것을 진지하게 듣는 동안에 발표자와 청중 양측이 서로에 대해 갖는 배려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 내부의 역사/영토분쟁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의 감정과 입장을 이해하고 그것에 적절히 반응하는 감성능력(emotional literacy)을 키우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이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방법을 배우고 그로부터 갈등을 해결하는 힘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발표가 갖는 또다른 의의는 홍콩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홍콩인/중국인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불러일으킨 반향이다. 2012년 여름 홍콩에서 발생한 댜오위다오를 지키자는 애국주의운동과 현지 학교에 의무적인 애국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하려는 베이징당국의 시도에 저항하는 국민교육반대운동[서남포럼 뉴스레터 175호에 실린 장정아 교수의 글 참조]이 얼핏 보면 서로 모순 같지만 대다수 홍콩인들에게 둘다 자연스러운 것이고, 중국인 정체성이 홍콩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상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말하자면 중국성(中國性, Chineseness)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이질적인) 정체성의 복합체인 셈이다. 이같은 취지의 주장에 중국 대륙에서 온 참석자는 소수자의 의견일 뿐이라고 비판적인 논평을 가했지만, 대만 학자는 오히려 공감을 표했다. 적어도 중국 대륙 이외의 참석자들에게는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기회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뒷풀이 자리에서 중국대륙의 다른 한 참석자는 “동아시아문화 속의 중국”이란 주제가 중립적이지 못한 논의를 조장한 게 아니냐고 내게 개인적으로 지적했다. 홍콩인 정체성에 대한 논란뿐만 아니라 한자, 조공질서, 인쇄매체상의 중국, 천하관이란 네 패널을 통해 중국을 다시 보려는 이번 회의의 구성에 대해 다소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때 나는 영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소통하려는 마음가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두번째는 토쿄에서 온 무라따 유지로(村田雄二郞) 교수의 ‘한자문화권’에 대한 발표이다. 이를 통해 중국문화란 무엇인가를 동아시아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신조어는 일본에서 1960년대부터 중국어학자 사이에서 쓰이다가, 1970년대 이후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과정에서 ‘문화권’ 개념을 도입해 역사교육을 하게 되자 일반 사회에 유통되어, 1980년대에 정착한 것이다. 전후 일본이 경제부흥을 이룩하면서 이웃 아시아 국가들과 (패전으로 단절된) 외교·경제관계를 새롭게 맺는 시기에 출현한 이 용어는 일본 자신의 문화와 역사의 주체성을 보증하는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문화권 개념을 정작 중국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잘 아다시피 중국에는 한족말고도 55개의 소수민족집단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어를 모어로 하지 않는 민족집단’(非漢語族)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런 역사적 현실이 있는데도 한자문화권이란 개념으로써 중국을 포괄한다면 한자문화를 중심으로 한 화이(華夷)적 위계질서 의식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언어면에서도 다문화공생의 요구되는 오늘의 중국 현실에서 한자문화권 개념은 무라따 교수의 지적대로 문제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이 전후 이웃 아시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한자문화권’을 창안했다면, 현재 한국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동아시아담론 내지 동아시아사가 아닐까 싶다. 1990년대 이래 대두된 동아시아담론의 연장에서 그 구현 형태의 하나로 2012년부터 고등학교에서 ‘동아시아사’ 교과목이 채택되었고, 일반인을 위한 동아시아사 개설서도 몇종 출간되었다. 홍석률 교수는 그 책들을 검토한 뒤 그 속에서 중국사가 단절되거나 소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요지의 발표를 했다. 집필자들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균형있게 다룬다는 취지에 충실하다 보니 중국사가 실상보다 축소되고 그 계기적 발전이 제대로 서술되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들으면서 지역사로서의 동아시아사를 실제 서술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또다시 절감하게 되었다. 그 어려움은 다름 아니라 중국과 그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변하지 않는’ 조건인 비대칭성에서 빚어진다.
어떻게 하면 그 비대칭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아시아사의 틀을 짜낼 수 있을까가 앞으로의 과제이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균형있게 다루되 중국사를 실상보다 축소하지 않는 어려운 작업은 역사서술상의 과제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는 21세기 전지구적 과제이다. ‘문제로서의 중국’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우리가 슬기롭게 감당하는 방법은, 국경을 횡단하여 설득력을 갖는 동아시아사를 서술하는 데서 암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포럼, 201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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